나의 이야기

에이블리즘(Ableism; Behindertenfeindlichkeit)과 안락사(Euthanasia)

뇌하수체 2011. 7. 23. 17:12

1939년 2월 20일 라이프치히(Leipzig)에서 동남쪽으로 20킬로미터 떨어진 폼센(Pomßen)이라는 마을에서 게하르트 크레치마(Gerhard Herbert Kretschmar)라는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아기의 아버지는 농장 일꾼인 리하르트 크레치마(Richard Kretschmar)라는 사람이었고 아기의 어머니는 리나 크레치마(Lina Kretschmar)였습니다. 아기 게하르트는 태어날 때 장님이었고 팔이 하나 밖에 없었으며 다리도 없었다고 합니다(다리가 하나 있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아기 게하르트는 또 자주 경기(convulsion)를 일으켰다고 합니다.

 

아기의 아버지인 리하르트는 아기 게하르트를 라이프치히 대학병원의 카텔 박사(Dr. Werner Catel, 1894~1981)에게 데리고 가서 아기를 영면(永眠)케 해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카르텔 박사는 그것은 불법(illegal)이어서 안된다고 거절했고 그러자 리하르트는 당시 독일의 총통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에게 청원서를 보냅니다. 총통의 청원서 담당 비서관이었던 보올러(Philipp Bouhler, 1899~1945)와 헤펠만(Hans Hefelman, 1906~1986)은 이 청원내용을 평소 중증장애인에 대한 안락사 필요성을 자주 언급하던 히틀러에게 보고합니다. 히틀러는 자신의 주치의인 브란트(Karl Brandt, 1904~1948)를 라이프치히로 보내 리하르트 크레치마의 청원내용이 사실인지를 조사하게 합니다. 라이프치히에서 브란트는 카텔 등 현지 의사들의 의견을 청취했고 아기 게하르트의 상태를 직접 살핀 후에 백치(白痴)이기도 하다는 진단을 내립니다. 브란트는 라이프치히 의사들에게 아기를 안락사 시키는 경우 비록 불법이지만 면소(免訴) 조치를 할 것이라는 히틀러의 지시를 전달하였고 라이프치히의 의사들은 아기를 안락사 시키는 것에 대해 동의를 합니다.

 

1939년 7월 25일 아기 게하르트는 세상을 떠났고 3일 후 폼센의 루터파 교회에 묻혔습니다. 아기의 사인은 “심장기능 저하(heart weakness)”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브란트와 카텔은 부인하였지만, 2007년 브란트의 전기(傳記)를 출간한 울프 슈미트에 따르면(Ulf Schmidt, 「Karl Brandt: The Nazi Doctor」, Hambledon Continuum 2007, p. 118), 아기 게하르트의 사인(死因)은 루미날(luminal)과 같은 약물 주입이라고 합니다. 게하르트가 세상을 떠난 지 불과 3주 후에 모든 중증 장애 어린이들에 대한 등록제도가 시행되었고 9월 1일에는 나치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됩니다. 그해 10월 나치독일은 9월 1일에 소급(遡及)하여 “안락사(Euthanasie)”라는 명목을 붙여 “생존지속가치없는 생명(life unworthy of life; Lebensunwertes Leben)”을 빼앗는 「작전명 T4(Aktion T4)」를 시작합니다. 성인에게까지 확대적용되어 강제적으로 실시된 T4 작전에 의해 1940년부터 1941년까지 중증장애인 약 7만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