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이덕일 선생의 「윤휴와 침묵의 제국」을 읽으며

뇌하수체 2011. 9. 27. 21:57

경기도 용인 법화산 기슭에 그늘이 점점 짙어져 갑니다.

 

9호선 탔다가 갈아타는 3호선 양재역에는 멋진 시도 있습니다.

 

 

잠결에 보니

 

                                                                       박지영

 

누가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아

잠결에 깨어 보니

어둠속에 아무도 없고

방안을 비추는 환한 달빛

너였구나 하고 바라보니

달이 훅 내 품에 안겨든다

봄 밤은 달 속에 그림자 하나 숨기고 있다

 

 

 

흐느적흐느적 이렇게 출퇴근길을 오가다 오늘 읽은 이덕일 선생의 책 「윤휴와 침묵의 제국」을 읽으며 ‘안도감’을 느꼈다가 문득 화가 나기도 합니다. 이덕일 선생은 그의 이번 책 제1장(p.17~52)을 청나라 강희제 시대 ‘치안불안’ 상태에 할애함으로써 윤휴의 ‘북벌론’의 정당성을 찾고자 하는 듯 보입니다만 그것은 ‘한국사 전공자’의 부득이한 선택이라고 여겨지면서도 ‘글로벌해진 시대’의 안목은 별로 배려하지 않은 듯 하다는 생각입니다. 그 바람에 독자들은 윤휴의 어쩌면 ‘생뚱맞은’ 북벌론으로 인해 노론 송시열 계열의 ‘실용주의’를 천만다행으로 여겼을 지도 모릅니다. ‘윤휴’를 읽으며, (북벌론에 관한 한) “송시열이 옳았구나” 독자들이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조선시대 효종이, 또는 윤휴가, 마찬가지로 송시열이, 사대주의에 함몰된 학자들이, 반청(反淸) 북벌(北伐)의 전의(戰意)를 불사를 때, 유럽에서는 ‘실용주의’ 국가 하나가 힘을 비축하고 있었습니다. 프로이센입니다. 베를린에 기반을 둔 프로이센 사람들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를 관찰하고, 프랑스 절대군주들에게서 배우며, 제국주의 최강 영국의 힘을 느낍니다. 그런데 이덕일 선생의 책에서는 윤휴가 뭐를 근거로 ‘북벌’을 그토록 고함을 쳤는지 납득할 만한 설명이 없어서 아쉬운 것입니다.

 

뒷심이 없었던 북벌론이 운위되던 운휴가 살던 시대, 프로이센의 대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Friedrich Wilhelm von Brandenburg)은 1620년에 태어나 1688년에 타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