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와 「번역과 문자 : 먼 것의 거처」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1877~1962)가 세상을 떠난 지 50년이 되는 금년에 스위스 루가노(Lugano)시 몬타뇰라(Montagnola)의 헤세박물관에서는 헤세를 추모하는 행사가 열리고 있다 합니다. 헤세는 독일 슈바벤 지방 칼브(Calw)에서 태어났지만, 증조부가 뤼벡(Lübeck)에서 발트3국 중 하나인 에스토니아(Estland; Estonia) 지역으로 이민을 갔었던 집안 내력에 따라 태어날 당시에는 러시아 국적을 보유하고 있었고, 나중에 외조부(Hermann Gundert, 1814–1892)가 활동하던 뷰르템베르크 왕국에서 독일국적을 취득했습니다. (당시의 독일제국은 통일된 국적법이 없었고 뷰르템베르크 왕국, 바이에른 왕국 또는 프로이센 왕국 등에서 국적을 취득하는 경우 독일제국의 국적을 가진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헤세는 1883년부터 1890년까지 스위스 국적을 잠시 보유하였다가 1923년 이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스위스인으로 살았습니다.
헤세의 국적 때문일 리는 없겠지요? 독일에서 헤세는, 「수레바퀴 밑에서(Unterm Rad, 1906)」나 「데미안(Demian, 1919)」 같은 소설 때문에 청소년들의 가출(家出)을 조장한다거나 또는 「싯달타(Siddhartha, 1919)」 같은 소설 때문에 가장들의 출가(出家)를 미화한다는 등의 비난을 다행히 받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만, 「유리알유희(Das Glasperlenspiel, 1943)」 등을 포함한 헤세의 작품세계 전체가 남성들 위주라는 이유로 헤세를 마초(Macho)라고 간주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 합니다(Georg Patzer, “Abweisender Macho und politischer Mensch”, 슈투트가르트 신문, 2012.6.20, http://www.stuttgarter-zeitung.de 참조). 특히, 독일의 대표적인 여권운동가 알리스 슈바르처(Alice Schwarzer, 1942~) 같은 이는 대놓고 헤세의 작품들을 읽지 말라고 한다 합니다.
알리스 슈바르처(2010년, 사진출처 : Michael Lucan)
이러는 가운데 「헤세의 여인들(Hesses Frauen)」이라는 책이 독일에서 최근 출간되었습니다. 이 책의 저자 베르벨 레에츠(Bärbel Reetz)는 헤세 작품 가운데 「클링소어의 마지막 여름(Klingsors letzter Sommer, 1919)」을 가장 좋아한다고 스스로 밝혔다 합니다. 헤세는 세 번 결혼하여 두 번 이혼을 했고 세 아들을 두었습니다. 헤세는 1904년 8월 스위스 바젤에서 아홉 살 연상의 사진작가 마리아 베르누이(Maria Bernoulli, 1868~1963)와 결혼하여 세 아들 브루노(Bruno, 1905~1999), 하이너(Hans Heinrich, 1909~2003), 마틴(Martin, 1911–1968)을 두었습니다. 그러다가 1924년에는 1919년부터 알고 지냈던 20년 연하의 스위스 여성 루트 벵거(Ruth Wenger, 1897~1994)와 두 번째 결혼을 했고 1927년에 이혼을 했습니다. 1931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출신으로 이혼을 한번 했었던 18세 연하 니논 도블린-아우스랜더(Ninon Dolbin-Ausländer, 1895~1966)와 세 번째 결혼을 했습니다.
생활인(生活人) 헤세의 결혼생활이 어떠하였는지 궁금한 사람은 궁금해 하더라도, 소설가(小說家) 헤세의 작품세계를 두고 ‘마초(Macho)들 천지’라고 비판하는 것은 어쩌면 29세에 출가(出家)한 석가모니를 ‘무책임한 가장(家長)’ 또는 ‘부인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남편’이라고 규정하는 것 만큼이나 부당하겠습니다만, 그러나 우리가 읽은 헤세의 작품들이 독일어 원본이 아니고 누군가 한국어로 옮겨놓은 번역본이었으므로, 프랑스의 번역철학자 앙트완 베르만(Antoine Berman, 1942~1991)이 조목조목 잘 지적하는 바와 같이, “모든 번역은 원문보다 길어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또는 “번역문은 원문보다 (형태적으로) 더 아름다워”졌기 때문에, 한국독자들이 독일독자들과 사실상 다른 작품을 읽은 셈이라면 독일인들이 그런 지적을 할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합니다(「번역과 문자 : 먼 것의 거처(윤성우․이향 옮김, 2011년 철학과 현실사 발행)」 p.79 및 p.81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