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 트라이치케와 “르방쉬 푸 사도바(Revanche pour Sadowa)!”
백제 웅진시대(熊津時代, 475~538)의 묘미(妙味)를 더해주는 책으로 동양대학교 정대영 교수가 번역한 「중국고고학-위진남북조(羅宗眞 지음, (주)사회평론, 2012년 10월 초판발행)」을 재미있게 읽고 문득 독일 역사학자 트라이치케(Heinrich von Treitschke, 1834~1896)를 떠올립니다.
중국 난징(南京) 金陵大學 출신 羅宗鎭 교수(1950~)가 쓴 책 「중국고고학-위진남북조」는 『20세기 중국 문물고고발견과 연구총서』의 하나로 2000년도에 원본이 간행되었다 하는데, 이 책 제8장 남북조시기의 대외 교류, 3. 한반도 및 일본과의 관계 부분(pp.275~278)에서는 충남 공주 송산리 고분을 언급하면서 “육조시기 중국과 일본의 교류는 해상을 통한 직접적인 교류뿐만 아니라 육로를 통해 한반도를 경유하여 일본에 이르는 또 다른 경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적고 있으며(p.276), 당시 중국 남방에서 일본으로 가는 해로(海路)가 지금의 중국 복건성(福建省)에서 대만, 오키나와를 거쳐 규슈 남부의 다네고시마(種子島)에 다다른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p.277).
위진남북조시대(220~589) 중국-일본간 해로
“르방쉬 푸 사도바(Revanche pour Sadowa)!”라는 구호가 있었습니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당시 프랑스측이 대놓고 드러낸 온당치않은 속마음(內心)입니다. 사도바(Sadowa; Sadová)는 체코 보헤미아 지방의 소도시 이름인데요, 독일통일 문제를 앞에 놓고 1866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군대가 대결하여 오스트리아군이 궤멸적인 패배를 당한 쾨니히그래츠 전투(Schlacht von Königgrätz)가 벌어진 바로 그곳입니다. 이웃나라 독일의 분열상태를 즐기면서 그 분열상태를 끝없이 끌고가려했던 프랑스로서는 참전할 겨를도 없이 전격적으로 프로이센 총리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 1815~1898)가 순식간에 승리해버린 ‘사도바 전투에 대한 복수(Revanche pour Sadowa; Rache für Sadowa)’를 도모하였던 것입니다.
그 시대 프로이센의 역사학자 트라이치케(Heinrich von Treitschke, 1834~1896)가 19세기 독일 ‘학계(學界)의 비스마르크’ 같은 존재였다고 평가된다면(Er unterstützte die preußische Staatsidee und Reichskanzler Otto von Bismarck), 문화유산을 아름답게 답사하는 ‘유홍준 선생’을 넘어서는 탁월한 역사학자가 21세기 이 나라에 등장할 때도 이제는 머지않았겠다는 기대를 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