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저 왕비, 클라우제비츠 그리고 요크 장군 (by Heinz Ohff)
1810년 7월 19일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루이저 왕비(Luise von Mecklenburg-Strelitz, 1776~1810)의 임종(臨終)을 지켜봤다. 장남 프리드리히 빌헬름(Friedrich Wilhelm 4세, 1795–1861)과 차남 빌헬름(Wilhelm 1세, 1797–1888)도 어머니의 임종를 지켰다. 루이저 왕비는 간절히 기도하는 왕에게 말했다. “당신은 내게 단 하나뿐인 친구였어요.” 그리고 왕비는 마지막 숨을 내몰아쉬며 신하 한 사람의 이름을 말했다. “하르덴베르크!”. 루이저 왕비의 죽음으로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삶 또한 한 시기가 막을 내린 셈이었다. 프로이센 국민 모두가 루이저 왕비의 죽음을 슬퍼했다. 누구보다 슬퍼한 사람이 왕이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루이저 왕비의 말에 따라 당시 외교장관이던 하르덴베르크(Karl August Freiherr von Hardenberg, 1750~1822)를 수상(首相)으로 임명했다. 이후(以後) 약 12년 동안 프로이센의 국정(國政)은 왕 보다는 수상이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하면서 수행되었다. 큰 고난과 시련을 맛 본 평화주의자(平和主義者)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로서는 전쟁(戰爭)의 시대에 국정을 수행하는 것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왕은 건축, 예술, 종교 등 문제에 관심을 가졌고 정치, 외교, 군사 등 문제는 주로 수상이 담당했다.
틸지트 화약(和約, 1807) 이후 프랑스에 대한 전쟁 배상금 지불의무로 인해 프로이센의 재정(財政)은 피폐(疲弊)해지고 있었다. 배상금을 지불하지 못하면 슐레지엔 지방을 빼앗겠다고 나폴레옹은 위협했다. 하르덴베르크 수상은 나폴레옹과의 동맹관계를 형식적이나마 유지하는 것이 당시로서는 부득이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프로이센의 궁박(窮迫)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모종의 근본적인 조치가 필요하다고 늘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모종의 조치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에 관하여 하르덴베르크는 알 수 없었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에 프로이센군이 프랑스의 동맹군으로 참여하기로 합의된 1812년 2월까지도 알 지 못하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러시아, 영국, 스웨덴을 제외한 유럽의 모든 국가들의 병력을 동원하여 대규모의 원정군을 편성했다. 총 61만 9천명 규모였으며 거기에는 프로이센 병력 2만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프로이센군 러시아 원정대의 사령관은 친(親)프랑스 성향의 그라베르트(Grawert) 장군이 임명되었으나 당시 프로이센군 참모총장 샤른호스트(Gerhard von Scharnhorst, 1755~1813)에 의하여 원정대의 부사령관으로 반(反)나폴레옹 성향의 요크(Ludwig Yorck von Wartenburg, 1759~1830) 장군이 선임되었고 그라베르트 장군이 원정 초기에 병(病)이 생기면서 요크 장군이 독자적으로 원정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프로이센군에게 러시아군은 단순히 적군(敵軍)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미묘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한때 샤른호스트 참모총장의 부관을 지낸 클라우제비츠(Carl von Clausewitz, 1780~1831) 장군은 프로이센이 나폴레옹을 지원하여 러시아를 공격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하여 1812년 프로이센군을 떠나 스스로 러시아군 소속이 되었으며 세인트 페터스부르크에서 후퇴하는 러시아군을 지휘했었다. 당시 러시아군이 후퇴할 때 선발대를 이끈 장교들도 프로이센 출신이 많았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와 러시아 알렉산드르 1세가 서로를 적(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고 알렉산드르 1세가 프로이센 원정대를 적군으로 간주하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다는 점도 모두 알고 있었다.
러시아의 초토화(焦土化) 작전에 걸려든 나폴레옹군의 본대(本隊)가 퇴각을 시작하면서 요크 장군의 프로이센군은 처음에는 다소 여유있게 후퇴를 시작했다. 그러나 곧 요크 장군의 프로이센군도 추위와 식량부족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요크 장군은 러시아군과의 독자적인 휴전협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으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와 하르덴베르크 수상은 요크 장군에게 명확한 훈령(訓令)을 보내지 않았다. 프로이센이 실질적인 적(敵)인 나폴레옹과 동맹을 맺고 복잡하고 위험한 이중플레이를 벌이고 있다는 점을 베를린의 왕과 수상도 잘 알고 있었으나 요크 장군이 요청한 때가 적절한 시기인지에 대해서는 확신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요크 장군이 어려운 결심을 하도록 한 사람은 아마도 클라우제비츠 장군이었을 것이다. 클라우제비츠는 군인으로서 스스로 목숨을 내놓고 용단(勇斷)을 내려야 한다고 요크 장군을 설득했다. 1812년 12월 30일 프로이센군은 요크 장군의 결정으로 러시아와 협상(Konvention von Tauroggen)을 벌여 프랑스와의 동맹에서 탈퇴하고 러시아와의 전쟁을 중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