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데나우어의 시대 (by Rudolf Großkopff)
1949년 8월 어느 무더운 일요일, 기민당(CDU)과 기사당(CSU)의 정치인 약 25명이 뢴스도르프(Rhöndorf)에 있는 콘라드 아데나우어(Konrad Adenauer, 1876~1967)의 빌라에 초대되었다. 대부분의 참석자들은 총선(1949.8.14) 이후에 가볍게 피로를 푸는 정도의 비공식적인 회합으로 생각했었다. 서독 제1대 총선의 결과에 의하면 기민기사연합(CDU/CSU)이 사민당(SPD)을 연정파트너로 선택할 수도 있었고 자유당과 같은 소수당과도 연정을 구성할 수 있었다. 기민기사연합 내 의견은 아직 통일이 되지 않고 있었다.
아데나우어는 참석자들 일부와 이미 의견을 절충한 상태였고, 회합 당일 오전에 사민당과는 함께 연정을 구성하지 않는다고 잠정적으로 확정한 상태였다. 사민당이 연방정부 차원의 연정파트너로 처음 참여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18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 가정에서 평소 검소한 생활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던 아데나우어는 그 날 일요일에는 손님들에게 좋은 포도주를 곁들인 근사한 뷔페를 제공했다. 그리고 이어 새로 구성될 정부의 각료인선문제가 논의되었다. 아데나우어는 나중에 “참석자 중 한사람이 자신을 수상으로 추천하는 바람에 놀랐었다”고 술회한 바 있지만, 당시 참석했던 CDU 소속 헤르만 퓐더(Hermann Pünder, 1888~1976) 의원에 의하면 그가 CDU 당총재인 아데나우어를 수상으로 추천했었고 그에 반대하는 의견도 없었으나 아데나우어가 수상으로 추천된 것에 대해 “놀랐었”던 것은 아마도 아니었을 것이다. 아데나우어는 그 자리에서 자신이 비록 고령이지만 2년 정도 수상직을 수행하는데 건강상의 문제는 없을 것이라는 주치의의 소견을 소개하였다.
아데나우어는 권력 자체에 대한 욕심은 없다고 자주 얘기하곤 했지만 14년 동안을 수상으로 재임하였다. 아데나우어 수상은 재임기간 내내 정국을 주도하면서 자신의 통치철학을 관철함으로써 ‘아데나우어 시대(Adenauer-Zeit)'와 ’수상 민주주의(Kanzler-Demokratie)'라는 표현을 탄생시켰다. 영국의 역사가 한 사람은 60년대 초반 출간한 책에서 아데나우어를 가르켜 “민주주의적인 독재자(democratic dictator)"라고까지 지칭했는데 아데나우어의 성격을 적확히 드러낸 역설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아데나우어 수상이 구사하는 어휘가 풍부하지 못했고 또 아메리카 인디언과 비슷한 인상을 준다 하여 재담가들은 그를 즐겨 익살의 소재로 삼았으나 훗날 헬무트 콜(Helmut Kohl) 수상에 대해 그러했던 것처럼 학자들은 아데나우어 수상이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그것을 끝까지 관철해내는 추진력을 가진 비범한 정치인이라고 평가한다. 1949년 9월 15일 기민기사연합(CDU/CSU)과 자민당(FDP) 및 독일당(DP) 연립정부의 수상으로 선출되었을 때 아데나우어는 73세였고, 1963년 10월 수상직에서 물러난 때는 87세였다.
아데나우어 수상이나 테오도어 호이스(Theodor Heuss, 1884~1963) 연방대통령(1949~1959) 등 집권여당(CDU/CSU, FDP)의 지도자들이 주로 빌헬름 시대(Wilhelminische Epoce. 1890~1918)에 주로 정치적으로 성장했던 것과 달리 당시 야당인 사민당(SPD) 지도자들 가운데는 반나치 활동을 주된 정치적인 이력으로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당시 SPD 당총재였던 쿠르트 슈마허(Kurt Scumacher, 1895~1952)는 나치의 강제수용소에 오랜 기간 구금되었었다. 아데나우어와 마찬가지로 다혈질이면서 카리스마 넘쳤던 슈마허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한쪽 팔과 한쪽 다리를 잃은 상이군인이었고 나치수용소 구금의 후유증으로 심한 당뇨에 시달렸으나 사회적 공평성의 제고와 패전으로 분단된 동서독 통일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연방하원에서 슈마허가 아데나우어를 가르켜 “독일인들의 수상이 아니라 연합국의 수상”이라고 비난했던 것은 두 사람간의 정책적인 차이를 선명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CDU의 아데나우어와 마찬가지로 SPD의 슈마허 또한 1952년 사망할 때까지 누구도 그를 대신할만 사람이 없는 독보적인 존재였다. SPD는 1959년 고데스부르크(Godesburg)에서 열린 전당대회에서 기존의 계급투쟁 노선을 버림으로써 나중에 집권정당으로 발돋움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