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인 자본주의 또는 사회적 시장경제 (by Rudolf Großkopff)
어느 토요일 오후 영국에서 온 여행자 한 사람이 미리 예약해 둔 서베를린의 한 여관에 들어섰다. 여관은 거의 난장판이었다. 공사하는 인부들이 연장을 들고 왔다 갔다 하고 있었고 시끄러운 소리에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하얀 침대 시트 아래에는 흙먼지가 그대로 있었다. 전쟁으로 인해 훼손된 여관 방 수리가 그 날 아침에야 비로소 시작된 것이었다. 그 영국 여행객이 외출을 했다가 새벽 2시쯤 방에 돌아왔을 때에는 미장이, 페인트공, 도배공 등 인부들이 모두 떠나고 없었다. 이튿날 아침 여행객이 일어나 보니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었다. 1953년 영국 작가 조지 마이크스(George Mikes, 1912~1987)가 독일을 방문했을 때 이런 경험을 했고, 전쟁 후 엄청난 속도로 재건을 해내는 독일인들의 솜씨에 경악했다. 조지 마이크스는 독일인들의 일솜씨가 영국인들 보다 낫고, 프랑스인들 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하면서, “독일사람들 일하는 것은 도저히 못당하겠다”고 적었다. 많은 외국인들이 특히 베를린 쿠담(Kurfürstendamm)을 보면서 조지 마이크스와 같은 생각을 했다. 고급상품으로 가득 찬 명품거리였던 쿠담은 전쟁으로 인해 거의 완전히 파괴되었다. 조지 마이크스가 쿠담을 둘러 본 1952년 무렵까지 쿠담에 늘어선 건물들의 절반은 아직 폐허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나머지 절반의 건물에는 호화로운 고급 상품들이 채워져서 쿠담은 다시 명품거리로서의 명성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1950년까지 화폐나 상품의 유통은 전후의 임시체제에 의하여 운영되었다. 이 후 서베를린을 포함한 서독 경제가 대약진을 시작하였다. 전후의 혼란상태가 경제적인 붐으로 전환된 것이다. 전후의 여건이 너무도 열악하였으므로 누구도 이런 ‘경제적 기적’을 예상하지 못했다. 실업률은 높았고 소득수준은 낮았으며 투자자본은 부족했다. 동프로이센과 슐레지엔 등 동부지방에서 수백만명의 난민이 밀려들었고 파괴된 도시는 폐허상태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외국인들에게 경제적인 ‘기적’이라고 비쳐지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은 ‘기적’이라기 보다는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전승국들의 대독일 전략적 전환을 가져온 국제정치적 환경과 적절할 경제정책, 그리고 어려움을 벗어나고자하는 독일인들의 의지가 잘 합쳐지면서 큰 성과를 거둔 것이었다. 독일인들은 거의 ‘일중독’에 가까울 만큼의 근로의욕을 발휘했다. 그래서 조지 마이크는 “독일사람들은 마치 하루에 28시간을 일하는 것 같다.”고 놀라워했다. 기사당(CSU) 당총재 프란츠 요셉 슈트라우스(Franz Josef Strauß, 1915~1988)는 “독일인들이 인류역사상 가장 최악이었던 1945년의 잿더미를 스스로의 힘으로 치워내고 재건했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지만, 독일사람들의 부지런함만으로 될 일이 아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국들의 공습으로 주택과 교통시설은 많이 파괴되었으나 생산시설에 대한 투자는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꾸준히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전쟁 중 군수품 생산에 이용되었던 산업시설은 전쟁 후에 일반상품 생산시설로 비교적 쉽게 전환될 수 있었다. 또한 1945년 당시 독일 산업부문의 잠재적 생산규모는 1930년대에 비해 훨씬 컸다. 그러므로 전후 독일경제가 아무것도 없는 상태(zero point)에서 출발한 것은 아니었으며, 비록 대호황의 조짐은 아니었지만 1950년에 이미 약간의 회복 조짐을 보였었다. 연합국들의 정책도 기여를 했다. 종전 직후 서방과 소련이 대립하면서 미국, 영국, 프랑스는 서독지역의 생산시설 해체와 다른 전쟁배상금 요구를 중단하였다. 미국이 마샬플랜에 의해 1951년까지 유럽에 지원한 총 124억 달러 금액 가운데 서독은 17억 달러를 무상 또는 유상으로 제공받았다.
경제적 기적의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화폐제도의 정비였다. 전쟁 전의 구 화폐가 가치를 잃어가면서 전쟁 직후에는 암시장과 물물교환이 성행했었다. 미국 담배가 기축통화 구실을 하기도 했다. 도시사람들은 농촌으로 직접 가서 공산품과 식량을 교환했으며 제조업자와 도소매상은 상품을 판매하기 보다는 창고나 점포에 쌓아두고자 했다. 1948년 6월 20일부터 서독지역에서 새로운 마르크화(Deutsche Mark)가 통용되었고, 동독지역에서는 그로부터 3일 후에 별도의 마르크화(Ostmark, "Deusche Mark der Detschen Notenbank")가 통용되었다. 당시 서독지역 점령군 경제행정관이었던 루드비히 에어하르트(Ludwig Erhard, 1897~1977)가 마르크화(D-Mark)의 창안자라고 간주된다. 끝으로, 기업인들도 경제적 기적을 달성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폴크스바겐 자동차회사의 노르트호프(Heinrich Nordhoff, 1899~1968), 전자산업의 개척자 그룬디히(Max Grundig, 1908~1989), 유통업의 네커만(Josef Neckermann, 1912~1992), 도이체방크의 압스(Hermann Josef Abs, 1901~1994), 자동차산업 분야 보르크바르트(Carl Friedrich Wilhelm Borgward, 1890~1963), 출판미디어 분야(Bertelsmann사)의 모온(Reinhard Mohn, 1921~2009) 등이 그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