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신성로마제국(Holy Roman Empire)의 왕조변천

뇌하수체 2010. 9. 12. 06:01

1806년까지 존속하였던 신성로마제국은 마지막 공식명칭이 ‘독일 신성로마제국’으로서 독일어로는 ‘Heiliges Römisches Reich Deutscher Nation’이고 라틴어로는 ‘Sacrum Romanum Imperium Nationis Germanicæ’라고 표기됩니다. 이에 대해, 18세기 프랑스의 계몽사상가 볼테르(Voltaire, 1694~1778)는 “이 나라의 이름은 ‘신성로마제국’이지만 신성(holy)하다고 말할 것이 없고, 로마적인(roman) 것과도 관련이 없으며, 제국(empire)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고 적은 바 있습니다. 사실, 볼테르가 살던 시대의 신성로마제국은 성직자들이 통치를 한 것도 아니었고(not holy), 로마인이 아니라 게르만인들의 나라였으며(not roman,) 국가연합에 가까운 것으로서 식민지 개척이나 제국주의를 표방한 사실도 없었습니다(not imperialistic).

 

신성로마제국의 왕조변천

구 분

주요 사건

중심지역

중세 초기

(600~1050)

- 843년 베르덩조약(카롤링거 왕조

  동프랑크 왕국 성립)

- 962년 리우돌핑거 가문 오토대제

  황제(Kaiser) 대관

라인-마인

바이에른

작센-튀링엔

중세 중기

(1050~1300)

- 1070년 살리어 가문 하인리히 4세

  ‘카놋사의 굴욕’

- 1152년 스타우퍼 가문 프리드리히 1세

  신성로마제국 황제 즉위

라인강 연안

독일 남서부

중세 후기

(1300~1500)

- 1346년 룩셈부르크 가문 카알 4세 즉위

- 1438년 합스부르크 알브레히트 2세 즉위

프라하

비인

근세 이후

(1500~1806)

- 합스부르크 가문 지속(단, 1742~1745

  비텔스바흐 가문 카알 12세 제위)

비인

 

그러나, 962년 최초의 신성로마제국 황제(Kaiser)의 칭호를 가지게 되는 오토(Otto) 1세(912~972)는 스스로를 ‘지상에서 신의 뜻을 실현하는 사람’이라고 여겼고 그래서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교회의 수호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오토대제는 리우돌핑거(Liudolfinger) 가문 출신인데, 이 가문은 샤를마뉴 대제의 카롤링거(Karolinger) 왕조(751~911)와는 친척이 됩니다. 오토대제의 시대까지는 아직 카롤링거 왕조 때의 로마 카톨릭과의 유대관계가 지속되었으므로 '신성(holy)'이라는 종교적 의미는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었고 그래서 국가명칭에도 ‘신성’이라는 표현을 굳이 집어넣지 않고 단순히 ‘동(東)프랑크 왕국(Regnum Francorum orientalium)’이라고 했습니다. 동프랑크 왕국은 샤를마뉴 대제(748~814) 사후 세 명의 손자들이 프랑크왕국을 분할하는 베르덩(Verdun) 조약(843)을 체결함으로써 생겨났으며, 동프랑크왕국은 신성로마제국의 전신(前身)으로서 오토대제가 황제의 칭호를 얻은 962년을 신성로마제국의 출발점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오토대제는 독일 중부 하르츠(Harz) 산지 동쪽지역 오늘날의 작센-안할트 지방에 근거지를 두고 엘베강 연안의 막데부르크(Magdeburg)에서부터 이탈리아의 로마까지를 아우르는 넓은 영역을 지배했으며 오토대제의 아들 오토 2세가 982년 이탈리아 원정에 나서면서 "로마 황제(Kaiser der Römer, Romanorum imperator augustus)"라는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1024년에는 살리어(Salier) 가문의 콘라드(Konrad) 2세(990~1039)가 라인강 가의 캄바(Kamba, Riedstadt)에서 독일왕에 선출됩니다. ‘로마황제’의 칭호는 1027년부터 사용합니다. 이 시기에는 처음부터 ‘로마황제’를 선출하는 것이 아니었고 먼저 ‘독일왕’으로 선출된 다음에 일정기간이 지나 ‘로마황제’의 칭호를 추가적(追加的)으로 취득하였습니다. ‘살리어’라는 가문 명칭은 오토대제의 사위였던 콘라드 더 레드(the red, 922~955)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살리어 가문은 불행하게도 교황권이 황제권과 치열하게 맞서고 있던 시기에 왕자(王者)의 자리에 올라 결국 이 가문 출신 하인리히 4세(1050~1106)가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1020~1085)에게 「‘카놋사(Canossa)의 굴욕(1070)」을 당하는 수모를 겪고 맙니다. 이 카놋사의 굴욕을 당한 후 살리어 가문은 차츰 힘을 잃기 시작하였고, 신성로마제국 왕자의 지위를 하인리히 4세의 외손자 콘라드 3세(1093~1152)가 속한 슈타우퍼(Staufer) 가문이 넘겨받게 됩니다. 1138년 독일왕에 선출된 콘라드 3세는 ’로마 황제‘의 칭호를 얻지 못하고 세상을 떠납니다.

 

콘라드 3세의 뒤를 이어 조카인 ’붉은 수염의 프리드리히 1세(Friedrich I., Barbarossa, 1122~1190)‘가 1152년 독일왕에 선출되고 1155년부터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칭호를 얻습니다. 한편, 카놋사의 굴욕(1070)으로 기세를 올린 교황은 1122년 보름스협약(Wormser Konkordat)이 이루어질 때까지 황제의 세속적인 권리에 대한 폄훼를 계속합니다. 신성로마제국의 성격에 대한 교황의 공격에 대응하여 프리드리히 1세가 1157년 ’신성한 제국(holy empire, sacrum imperium)'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게 되는데 오토대제 시절에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져서 표현되지 않았던 '신성(holy)'이라는 개념이 국가명에 명시적으로 등장하게된 것입니다. 1189년 제3차 십자군 원정을 이끌다가 1190년 아르메니아에서 사망한 프리드리히 1세는 19세기 후반 프로이센의 역사학자 드로이센(Johann Gustav Bernhard Droysen, 1808~1884) 등에 의해 특히 집중적인 조명을 받았습니다. 또한 프로이센 호헨촐레른 왕가 빌헬름 1세(1797~1888)는 스스로를 “하얀 수염(Barbablanca)“이라고 지칭하여 슈타우퍼 가문과의 관련성을 부각시키기도 했습니다. 슈타우퍼 왕가와 호헨촐레른 왕가는 독일 남서부 슈트트가르트 인근 슈바벤 지방에서 출발했다는 공통점이 있기도 합니다. 슈타우퍼 가문은 프리드리히 1세의 손자인 프리드리히 2세(1194~1250)라는 걸출한 황제를 배출한 후, 프리드리히 2세의 외아들 콘라드 4세(1228~1254) 때 독일내에서 급속히 권력기반을 상실했습니다. 콘라드 4세가 이탈리아로 되돌아간 다음 그의 아들 콘라딘(Konradin, 1252~1268)이 시칠리아 지배권을 잃고 나폴리에서 참수(斬首)됨으로써 슈타우퍼의 남계혈족은 단절됩니다.

 

슈타우퍼 가문 프리드리히 2세 사후 ‘독일왕(King)'은 선출되었지만 ‘신성로마제국 황제(Kaiser)’는 존재하지 않는 시기가 약 62년 동안 이어집니다. 그러다가 1312년에 비로소 룩셈부르크(Luxemburg) 가문에서 다시 ‘황제’를 탄생시키는데 성공합니다. 1308년 프랑크푸르트에서 7명의 선제후에 의해 독일왕으로 선출된 룩셈부르크 가문의 하인리히 7세는 1309년 당시 아비뇽 유수(Avignonese Captivity, 1309~1377)에 의해 프랑스에서 집무를 행하고 있는 교황 클레멘스 5세와 접촉을 시작하여 ‘로마황제’ 대관에 대해 동의를 얻는데 성공한 후, 1310년 이탈리아 원정에 나서서 1312년 프랑스 아비뇽에 머무르던 교황이 파견한 주교의 집전으로 신성로마제국 황제 대관식을 거행했습니다. 하인리히 7세가 1313년 이탈리아 토스카나에서 말라리아에 걸려 사망하고, 그의 아들 요한(Johann von Luxemburg, 1296~1346)이 1340년 양쪽 눈의 시력을 모두 잃은 후에도 백년전쟁에 프랑스 편으로 참전하여 1346년 전사한 해에 하인리히 7세의 손자 카알 4세(Karl IV., 1316~1378)가 독일왕에 선출되고 1355년에는 아비뇽 교황 이노센트 6세가 파견한 주교에 의해 로마에서 황제(Kaiser)에 즉위합니다. 카알 4세는 프라하(Praha)에서 통치하면서 1348년에는 중유럽에서 최초로 대학(Karls-Universität, Univerzita Karlova, 비인대학 1365년, 하이델베르크대학 1386년 설립)을 세웠고 1357년에는 카를교(Karlsbrücke)를 건설하는 등 프라하의 황금시대를 열었습니다. 1356년에는 금인칙서를 제정하였고 1375년에는 ‘붉은 수염’ 프리드리히 1세 이래 최초로 북독일 발트해 연안의 한자도시(Hansestadt) 뤼벡(Lübeck)을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이 선제후의 지위를 부여받은 것도 카알 4세 때의 일입니다. 나중에 프로이센 왕가가 되는 호헨촐레른 가문은 당시 뉘른베르크 제후(Burggrafschaft Nürnberg)로 있었습니다.

 

카알 4세가 가지고 있던 모든 지위(신성로마제국 황제, 독일왕, 보헤미아왕, 헝가리왕, 크로아티아왕,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는 아들 지기스문트(Sigismund von Luxemburg, 1368~1437)에게 승계됩니다. 그런데 지기스문트를 끝으로 룩셈부르크 가문의 남계혈족은 대가 끊기고 사위 알브레히트(Albrecht II. von Habsburg, 1397~1439)가 상속을 받습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이후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당시 3년 동안을 제외하고 1806년 신성로마제국이 해체될 때까지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지위를 독차지하게 됩니다. 한편, 1438년 합스부르크 가문 알브레히트 2세가 독일왕에 오를 무렵 처음으로 “신성로마제국”이라는 명칭 뒤에 “독일”이라는 수식어가 나타나는데, 15세기 말 이후에는 이탈리아에 대한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영향력이 제한적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지면서 기존의 ‘신성로마제국(Sacrum Romanum Imperium, holy roman empire)'이라는 명칭은 ’독일민족의 신성로마제국(Sacrum Romanum Imperium Nationis Germanicæ, holy roman empire of german)’으로 바뀌게되고 이것이 1806년 신성로마제국이 해체될 때까지 공식명칭으로 유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