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Lingua franca 라틴어, 프랑스어, 영어
영어(English)가 「Lingua franca(국제어, 세계어)」로 유럽에서 처음 인정된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체결된 베르사이유 조약(Treaty of Versailles, 1919) 때였습니다. 베르사이유 조약 이전까지는 프랑스어로만 작성되던 조약문서가 처음으로 프랑스어와 영어로 각각 기록된 것입니다. 'Lingua franca'로서 영어의 국제적인 지위는 20세기 이후 실로 눈부시게 도약을 했지만 'Lingua franca'라는 표현은 이탈리아어로 ‘프랑크왕국의 언어’라는 표현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프랑크왕국의 영역(481년~814년) [출처 : Sémhur]
서로마제국 멸망(476) 이후 서유럽의 새로운 패자가 된 프랑크왕국(Francia, Frankish Kingdom)은 초대왕 클로비스(Clovis, 466–511)가 카톨릭으로 개종한 5세기부터 9세기경 샤를마뉴대제 시절에 이르기까지 로마시대의 라틴어 문화에 계속 동화가 됩니다. 프랑크왕국에서 고대로마의 법제(Lex Salica)와 행정제도를 받아들인 까닭에 샤를마뉴대제(740~814)의 모국어는 비록 게르만 계통의 프랑크어(Franconian languages; Fränkische Sprachen)였지만 프랑크왕국에서는 라틴어가 특권계층의 언어로 자리를 잡습니다. 이 시기 프랑크왕국에서 쓰던 라틴어(Vulgar Latin; Vulgärlatein)는 문어(文語, literary language)와 구어(口語, colloquial language)가 현저한 괴리를 보이고 있어서 813년에 열린 투르 종교회의(Konzil von Tours)에서는 성직자들이 설교를 할 때 일반신도들이 알아듣기 쉬운 언어를 사용하도록 원칙을 정하기도 합니다.
이리하여 프랑크왕국의 언어는 적는 것(writing)은 라틴어로 하고 말하는 것(speaking)은 프랑크어로 했던 이른바 ‘한 국가, 두 언어 시스템(diglossia; Diglossie)’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9세기경 프랑크왕국이 서프랑크왕국과 동프랑크왕국으로 분열됨에 따라 ‘한 국가 두 언어 시스템’은 다른 양상을 띠게 됩니다. 즉, 프랑크어가 서프랑크어(프랑스어 계통)와 동프랑크어(독일어 계통)로 갈라지면서 (1)라틴어로 적고 서프랑크어로 말하는 서프랑크 지역(프랑스)과 (2)라틴어로 적고 동프랑크어로 말하는 동프랑크 지역(독일)으로 양분되는 것입니다. 이런 양분이 확인되는 최초의 사료가 842년에 이루어진 「스트라스부르의 서약(Oaths of Strasbourg; Straßburger Eide; Les serments de Strasbourg)」이라는 기록입니다. 이 서약은 프랑크왕국을 삼분하게된 샤를마뉴 대제의 손자들 중 둘째와 셋째 손자인 샤를(서프랑크)과 루드비히(동프랑크)가 장손자인 로타르(중프랑크)에 대항하기 위해 고(古)프랑스어와 고(古)독일어로 서로 연대할 것을 상호간에 서약하였다는 내용입니다. ‘스트라스부르의 서약’은 실제로는 10세기나 11세기경에 씌여진 것이라는 주장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나 프랑스어와 독일어가 형성되는 과정과는 무관하게 문어(literary language)로서 라틴어는 프랑스왕국이나 신성로마제국에서 공용어로 계속 그 지위를 유지합니다. 특히 중세대학의 강의는 모두 라틴어로 진행되었고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 1571~1630),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 등 천문학자들의 획기적인 연구가 모두 라틴어로 발표되었을 뿐 아니라,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의 철학(“Cogito ergo sum”)과 아이작 뉴턴(Isaac Newton, 1642~1726)의 물리학(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도 모두 라틴어로 저술되었습니다.
프랑스어가 라틴어를 대신하여 프랑스왕국의 공용어가 된 것은 1539년 프랑수와 1세(François I, 1494~1547)가 반포한 「빌레르-코트레 칙령(Edikt von Villers-Cotterêts)」에 의해서였습니다. 1634년에는 리슐리외(Armand-Jean I. du Plessis de Richelieu, 1585~1642)에 의해 프랑스 학술원(Académie française)이 세워지고 프랑스어의 통일이 이루어지면서 프랑스어는 17세기부터 유럽 귀족들 사이에서 Lingua franca 지위를 획득하게 됩니다. 18세기 이후에는 러시아, 폴란드 등 동유럽에서도 프랑스어를 Lingua franca로 받아들입니다. 이로서 당시까지 라틴어가 차지하고 있었던 외교무대에서의 Lingua franca 지위가 프랑스어로 넘어가게 됩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이 반(反)마키아벨리론(論)을 프랑스어(Anti-Machiavel)로 저술하고 포츠담의 성 이름을 프랑스어(상수시, Sanssouci)로 붙인 것도 이 시기의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