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프리드리히 1세의 妻家 하노버家門 (by 카린 포이어슈타인-프라서)

뇌하수체 2010. 7. 6. 23:47

 

정략결혼과 형제간의 약혼자 인계인수

“독일의 공주나 귀족집안의 딸들은 많은 경우 청혼을 해온 남자들 중 아무에게나 그냥 주어버리기 때문에 대부분 불행해진다”고 명민했던 하노버 제후부인 소피 폰 하노버(1630~1714)는 말한 바 있다. 이런 말을 했던 소피 부인은 정작 자신이 극진히 사랑했던 외동딸 소피 샤로테가 바로 그 불행한 운명에 처하게 되는 것을 막지 못했고 또 막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자녀들의 혼사와 같은 중요한 문제는 아버지들과 남편들이 결정을 했고 어머니들과 부인들은 남자들의 결정에 따를 수 밖에 없었던 것이 당시의 현실이기는 했다. 제후 가문의 경우 자녀들의 혼사는 외교정책수단의 하나였고 결혼생활의 가장 큰 목적은 가능한 한 많은 아들을 낳는 것이었다. 소피 부인 자신의 결혼 또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소피 부인은 딸 소피 샤로테를 1668년에 낳았다. 당시 소피 샤로테의 친정가문은 아직 보잘 것이 없었다. 소피 샤로테의 부친 에른스트 아우구스트(1629~1698)는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지역의 벨펜(Welfen) 가문 출신으로 1661년에 비로소 개신교 주교 겸 제후의 지위에 올랐다. 에른스트 아우구스트가 주교 겸 제후의 지위에 오르기 이전 소피 샤로테 가족은 하노버공(公)이었던 큰아버지 게오르그 빌헬름의 성(城)에서 3년 동안 더부살이를 했었다. 큰아버지 게오르그 빌헬름은 1624년생으로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보다 다섯살이 많았다. 독일의 벨펜(Welfen) 가문은 샤를마뉴 대제의 카로링거 왕조 때부터 존재했던 가장 오래된 제후 가문의 하나로 12세기경 사자왕(獅子王) 하인리히(1129~1195)가 독일 최강의 권력자로 군림한 이래 상속권분할로 분열을 거듭하다가 1635년 북부 독일의 하노버 인근지역에서 4명의 형제들간에 상속에 관한 계약이 체결되어 벨펜 가문의 연대(連帶)가 최초로 이루어졌는데 이들 4명의 형제들 가운데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와 게오르그 빌헬름이 속해 있었다.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는 이들 벨펜가(家) 4형제 중 마지막으로 1679년에 비로소 하노버공(公)의 자리를 물려받았었다. 소피 샤로테가 태어난 지 11년이 지난 후였다.

 

소피 샤로테의 어머니 소피 부인은 부친이 팔츠(Pfalz)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였고 모친은 영국 스튜어트 왕가(王家)의 엘리자베스 스튜어트 부인이었다. 소피 부인은 1658년에 이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의 형이었던 게오르그 빌헬름과 약혼을 했었으나 게오르그 빌헬름과의 파혼 후 약혼자의 동생이었던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와 결혼을 했다. 게오르그 빌헬름과의 약혼이 무슨 이유로 깨졌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한창 눈이 높았던 벨펜가의 제후 게오르그 빌헬름에게 소피 부인의 미모가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던 것 같다. 소피 부인은 당시 비교적 흔했던 질병인 마마를 앓고 난 후 얼굴에 약간 곰보자국이 있었고 당시 인물화에 묘사된대로 코는 너무 크다는 느낌을 주었으며 갈색 머리칼은 듬성듬성하고 숱이 많지 않아서 미인이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게다가 그녀 나이는 당시 기준으로는 노처녀라 할 28세였었다. 소피 부인 자신은 게오르그 빌헬름이 이탈리아인 정부(情婦) 때문에 결혼을 할 입장이 아니었다고 일기장에 적었지만 벨펜 가문의 남자들이 정부를 두는 것은 늘상 있는 일이었으므로 결혼을 못하는 이유가 정부 때문이었다는 소피 부인의 기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약혼은 해놓고 결혼은 못하고 있는 약혼녀 소피에 대한 책임감으로 게오르그 빌헬름은 막내아우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에게 자기 대신 소피와 결혼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당시 상류사회 사교계를 이미 경험했던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는 형의 그런 제안에 솔깃하지 아니하였고 여성적이지도 않았던 소피가 장차 제후의 부인감으로 적당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었다. 그가 형 대신 소피와 결혼하기로 결심한 것은 순전히 정치적인 이유때문이었다. 형의 약혼자와 결혼하는 것은 그에게 형의 제후 지위를 승계받는 보증수표였다. 1658년 4월 18일 두 형제는 보기드문 계약을 체결하였는데 형은 앞으로 결혼하지 않으며 죽으면 동생에게 모든 통치권을 승계한다는 내용이었다.

 

소피와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의 결혼은 1658년 9월 30일 하이델베르크에서 거행되었다. 결혼식을 마친 신혼부부는 신혼살림을 공교롭게도 하노버의 게오르그 빌헬름 저택에서 시작하였다. 세 사람이 한 지붕 밑에서 거주하던 시절은 게오르그 빌헬름이 늘 활달한 모습의 소피에게 매력을 느끼고 소피와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두 사람 관계에 대해 질투심 마저 가지게 되었기 때문에 편안하지 못하였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661년에 에른스트 아우구스트가 주교 겸 제후가 되어 별도의 저택으로 이사하게 된 것을 소피 부인이 특히 기뻐했던 것은 이런 사정 때문이었다.

 

 

소피 샤로테의 어린 시절

 

이렇게 우여곡절을 거친 제후가문 사이의 혼인은 그래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1660년에 여섯 아들 중 장남인 게오르그 루드비히가 태어났고 게오르그 루드비히는 훗날 하노버공(公)을 겸하면서 영국왕 조오지 1세로 즉위하게 된다. 1668년 7남매 중 네 번째로 태어난 소피 샤로테는 외동딸이었고 어머니로부터 극진한 사랑을 받았다. 아버지도 생기있고 당찬 어린딸을 보면서 즐거워했으나, 아버지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에게는 외동딸 외에도 사랑하는 여자가 또 있었다.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와 소피 부인 사이의 결혼생활은 예상했던 것과 달리 비교적 행복했으나 소피 샤로테를 낳은 후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의 총각시절 버릇이 나오면서 다른 여자들을 찾기 시작했다. 소피 부인은 남편의 여성편력에 대해 “결혼이 하노버공의 호색(好色) 기질을 바꾸어 놓지는 못했다. 같은 것을 계속 가지고 있는 것을 그는 지겨워했다.”고 자신의 일기장에 기록했다.

 

아버지 에른스트 아우구스트가 외도(外道)로 집을 비우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소피 샤로테의 양육은 전적으로 어머니에게 맡겨졌다. 어린 소피 샤로테는 6명의 남자형제들과 함께 교육되었다. 3명의 오빠와 3명의 남동생들과 함께 뛰어놀고, 함께 얘기하고, 애완동물 기니피그를 함께 키웠다. 소피 샤로테는 오빠들이나 남동생들에게 무엇이든 뒤지지 않으려 애썼으며 그녀의 부모는 그 시대의 관례에서 벗어나 딸도 아들들과 동일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특히 외국어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한 것이 큰 효과를 발휘했다. 소피 샤로테는 어린 나이에 이미 프랑스어를 모국어 수준으로 구사하였고 영어와 이탈리아어도 유창하게 구사했다. 라틴어도 공부하였으나 당시 라틴어는 우아한 발음을 선호하는 유럽 궁정의 시대적인 유행에 따라 프랑스어나 이탈리아어에 의해 천천히 밀려나고 있는 중이었다.

 

소피 샤로테는 명랑하고 활발한 어린이였으며 흥미있는 내용을 발견하면 마치 노는 것처럼 즐겁게 공부를 했다. 그녀가 책읽기를 좋아한 것은 어머니 소피 부인을 닮은 것이었다. 소피 부인의 독서량은 엄청났으며 특히 프랑스어로 된 책을 많이 읽었다. 소피 샤로테의 음악적인 재능도 집안 내력을 물려받아 뛰어났다. 첼로와 합시코드(Cembalo) 연주는 전문가 수준이었으며 작곡도 했다. 훗날 베를린 궁정에서의 음악연주는 널리 알려졌을 뿐 아니라 음악전문가들의 찬사를 받기도 했다. 베를린 샤로텐부르크성(城)에는 소피 샤로테 왕비의 합시코드가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소피 샤로테가 11살이던 때 생활에 큰 변화가 있었다. 1679년에 브라운슈바이크-볼펜스뷔텔 지역을 통치하던 백부(伯父) 요한 프리드리히가 사망한 것이다. 소피 샤로테의 아버지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는 하노버 벨펜 가문 4형제 중 막내로서 죽은 형의 지위를 승계하였고 가족들은 하노버로 이주하였다. 약혼녀였던 소피 부인을 동생에게 떠넘기고 동생 부부와 한지붕 밑에서 3년을 살았던 또 다른 백부 게오르그 빌헬름은 1665년에 죽은 장형(長兄) 크리스티안 루드비히를 승계하여 이미 하노버를 떠나고 없었다. 하노버에 새로 이사한 저택은 넓은 정원을 끼고 있었고 바로 그 정원에서 소피 샤로테는 당대 일류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였던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G.W.Leibniz, 1646~1716)를 알게 되었다.

 

라이프니츠는 소피 샤로테의 삶에 상당히 큰 영향을 준 사람이었지만 하노버로 이주한 후 철학자 라이프니츠와 산책하는 것 보다 소피 샤로테가 우선 해야 할 일이 예정되어 있었다. 어머니 소피 부인은 딸을 위해 외국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태양왕 루이 14세(1638~1715)에 의해 당시 유럽정치의 중심지가 되어 있었던 파리에서 머무르면서 가는 길에 네덜란드의 친척도 방문할 예정이었다. 네덜란드는 소피 부인 자신이 태어난 곳이기도 했는데 영국왕 제임스 1세(1566~1625)의 딸이었던 모친 엘리자베스 스튜어트와 부친인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가 30년 전쟁(1618~1648) 초기에 카톨릭측 군대에 패퇴하고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때 태어났었다.

 

파리에 도착한 소피 샤로테는 누구에게나 스스럼없이 대하며 파리에 온 것을 즐거워했고 거기에서 자기보다 16살이 많은 사촌언니 엘리자베트 샤로테를 만났다. 엘리자베트 샤로테(1652~1722)는 리젤로테 폰 팔츠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는데 프랑스 루이 14세의 동생인 오를레앙공(公) 필립 1세와 결혼하였으나 그다지 행복하지 못한 삶을 살았다. 소피 부인은 엘리자베트 샤로테의 고모였다. 엘리자베트 샤로테의 생모와 이혼한 소피 부인의 오빠는 계모에게서 전처 소생의 딸을 떼어놓기 위해 7살인 엘리자베트 샤로테를 하노버의 고모에게 보냈었고 소피 부인은 오빠의 딸을 4년 동안 보살펴 주었다. 고모와 함께 지냈던 하노버에서의 4년은 엘리자베트 샤로테에게 천국처럼 행복했었다. 1710년 2월 27일 58세의 엘리자베트 샤로테는 한 편지에서 “내 인생에서 하노버 시절 보다 더 행복한 때는 없었다”고 썼다. 15년이 지난 후 파리에서 질녀인 엘리자베트 샤로테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을 소피 부인은 기뻐했다.

 

 

태양왕 루이 14세 알현

 

독일의 하노버에서 프랑스의 파리까지 가는 것은 먼 길이었고 여행이 항상 즐거운 것만은 아니었다. 도로는 좋지 않았고 마차도 마찬가지여서 제후 집안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심하게 흔들리면서 여행을 했다. 달리는 마차가 부서져서 사상자가 생기는 사고도 자주 발생했다. 마차를 타고 먼 길을 여행하는 괴로움과 지루함을 덜기 위해 소피 부인은 딸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이야기 중에는 사촌언니 엘리자베트 샤로테가 하이델베르크에서 하노버를 거쳐 현재 파리에서 살게 된 내력도 포함되었다. 자신의 뜻과 관계없이 결혼을 강요받는 그 시대 공주들이나 귀족집안 딸들이 겪어야 했던 슬픈 이야기였다.

 

태양왕 루이 14세는 1670년 동생인 오를레앙공(公) 필립 1세의 부인이 갑자기 사망하자 동생의 신속한 재혼을 추진하였다. 이런 결혼에는 막대한 지참금이 오고갈 것으로 짐작하여 당시 프랑스에 살고있던 엘리자베트 샤로테의 고모 한 명이 기민하게 나서서 프랑스 왕실과 독일 팔츠 제후가문의 결혼협상을 솜씨있게 주선하였다. 결혼협상에서는 두 가지 큰 문제가 있었다. 하나는, 프랑스 왕실이 카톨릭이었으나 엘리자베트 샤로테는 개신교 신자였다는 점이었고 다른 하나는, 엘리자베트 샤로테가 비록 영국왕 제임스 1세의 증손녀였지만 프랑스왕실과 혼사를 맺을 신분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게다가 팔츠 제후 가문은 당시 재력도 튼튼하지 못했다. 그러나 정치적인 타산을 따져 보면 이 혼사는 양측 모두에게 득이 되는 일이었다. 루이 14세는 라인강 중류에 위치한 팔츠 지방에 대한 상속권(相續權)을 확실히 굳힐 수 있다고 생각했고 팔츠 제후가문으로서는 당시 유럽 최강의 왕실과 사돈관계를 맺어두기를 원했다. 많은 지참금을 지불하는 이유가 ‘딸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은 부차적이었다. 엘리자베트 샤로테가 은밀히 카톨릭 교리를 익힌 후에 12살 연상이었던 필립 1세와의 혼인이 최종적으로 결정되었다. 엘리자베트 샤로테로서는 이 모든 것을 운명이라고 생각하며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결혼식은 1671년 11월 16일 거행되었다. 결혼과 동시에 엘리자베트 샤로테는 궁정에서 왕비 다음으로 서열 2위의 여성이 되었으나 서열만으로 파리생활이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궁정 사람들이나 남편 모두 그녀가 생각했던 것과 너무 달랐다. 남편 필립은 항상 향수가루를 뒤집어쓰고 다녔으며 후손을 남겨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부인과 침소를 같이 하기는 했으나 부인 보다 정부(情夫)들을 더 가까이 했던 동성애자였다. 두 사람 사이에 세 번째 아이가 태어난 1678년부터 두 사람은 별거에 들어갔다. 프랑스의 궁정은 엘리자베트 샤로테에게 고향같은 느낌을 조금도 주지 못하였다. 파리의 궁정에서 엘리자베트 샤로테는 늘 숨이 막히는 듯한 답답함을 느꼈으며 고향의 친구들과 친척들에게 수많은 편지를 쓰면서 위안을 삼았다. “자신의 생각을 솔직히 말하지 않고 뻔히 드러날 거짓말이나 늘어놓는 사람들 틈에서 나는 살아가고 있다. 그 사람들은 안 보이는 곳에서 나에 대해 온갖 못된 험담을 해댄다. 참 고통스러워서 생활 자체에 대해 환멸을 느끼게 된다. 혹시 매를 맞고 이런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그 사람들에게 차라리 나를 몰래 때리고 가라고 말하고 싶다.”

 

파리의 궁정에서 엘리자베트 샤로테가 겪은 답답한 생활은 고스란히 소피 부인이 경험한 것이기도 했다. 누구하고도 속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가 없었으며 오직 자라나는 딸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고작이었다. 소피 샤로테도 어머니와 함께 온 파리에서 그러한 궁정생활의 이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루이 14세의 질녀(姪女)인 마리 루이스와 스페인의 젊은 왕 카를로스 2세의 결혼식에 초대받아 간 소피 샤로테는 왜 엘리자베트 샤로테가 파리생활에 짜증을 냈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하노버에서 비교적 자유분방하게 자란 소피 샤로테는 프랑스 궁정의 엄격한 격식과 절차에 심한 압박감을 느꼈다. 루이 14세 궁정의 형식주의적인 엄격성이 하노버에는 없었다. 소피 샤로테는 자연의 맛을 잃은 프랑스 궁정의 공기가 자신의 몸속으로 들어오는 느낌을 받았다.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느낌이었다. 소피 샤로테와 루이 14세의 왕세자 루이(1661~1711)와의 혼인을 추진하려던 계획을 포기한 데에는 프랑스 궁정에서의 이런 경험도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모녀는 즐거운 마음으로 하노버에 돌아왔다. 그 후 소피 샤로테는 혼자서 한번 더 파리를 방문하였다. 당시 결혼이 가능한 나이였던 15살 때였으며 거의 1년을 파리에서 머무르면서 귀족사회의 예의범절을 익혔다. 소피 부인은 내색을 하지는 않았으나 프랑스 루이 왕세자와의 혼담이 성사되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소피 부인은 영국 스튜어트 왕가의 후손인 것을 늘 자랑스러워했고 자식들이 언젠가는 유럽 정치권력의 핵심인물이 되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소피 부인과 스튜어트 가문에 대한 자부심

 

소피 부인의 친정은 모계(母系)로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1542~1587)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메리 여왕은 같은 스튜어트 가문의 친척인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1533~1603)에 의해 엘리자베스여왕을 살해하려는 음모에 연루되었음이 밝혀져서 사형에 처해졌다. 평생을 독신으로 지낸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을 승계하여 영국왕이 된 제임스 1세(1566~1625)가 메리 여왕의 아들이다. 제임스 1세의 자녀로 성년 이후까지 생존했던 사람은 딸 엘리자베스(1596~1662)와 아들 찰스(1600~1649) 두 명인데 찰스는 훗날 영국왕 찰스 1세가 되었고 엘리자베스는 독일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의 부인이 되었다. 바로 이 엘리자베스 스튜어트가 소피 부인의 어머니였다.

 

소피 부인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태어나던 때는 양친이 네덜란드에서 망명한 지 거의 10년이 되어가던 시기였다. 1618년 5월 보헤미아의 개신교 귀족과 오스트리아 출신 카톨릭교도 국왕 사이에서 시작된 30년 전쟁은 1619년 8월 보헤미아 개신교 귀족들이 새 국왕으로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를 선출하였고 팔츠 선제후가 이를 수락하면서 전쟁에 개입하였으나 1620년 11월 프라하 근처에서 카톨릭 연합군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한 후에 네덜란드로 피신하였었다. 프리드리히 5세는 1632년에 병사(病死)했고 엘리자베스 스튜어트는 1649년 영국으로 되돌아 갔다.

 

소피 부인은 헤이그에서의 유년시절이 행복하지 않았다고 회상하면서 “나의 어머니는 자식들 보다 집에서 키우던 애완용 개나 원숭이에게 더 관심이 많았다”고 적었다. 엘리자베스 스튜어트는 13명의 자식을 두었고 그 중 두 명이 제후의 반열에 올랐다. 한 명은 소피 부인이고 다른 한 명은 소피 부인의 오빠인 카알 루드비히이다. 카알 루드비히는 30년 전쟁이 끝난 후에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팔츠 선제후를 되찾았고 이혼한 전처의 딸 엘리자베트 샤로테를 프랑스 루이 14세의 궁정으로 시집보낸 사람이다. 소피 부인은 하노버의 선제후 부인이자 프로이센 최초의 왕비의 어머니이며 나중에는 영국왕 조지 1세의 어머니까지 되었다. 엘리자베트 스튜어트의 다른 자식들은 대부분 일찍 사망했으나 딸 루이서 홀란디너는 카톨릭으로 개종하여 프랑스에서 수도원장을 지냈고, 또 다른 딸 엘리자베트는 독일에서 개신교 수도원장을 지냈다.

 

소피 부인은 20살 때 오빠 루드비히와 하이델베르크로 돌아왔으며 선제후였던 루드비히는 여동생 소피가 하노버의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와 결혼할 때 까지 보살폈다. 하노버의 벨펜가(家) 두 형제인 게오르그 빌헬름과 에른스트 아우구스트가 이탈리아로 가는 길에 하이델베르크에 체류하기 전 까지만 해도 소피 부인은 평온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으나 그 후 형제간의 약혼자 인계인수의 소동에 휩쓸리게 된 것이었다. 그 때 게오르그 빌헬름은 약혼녀였던 소피 부인을 동생의 결혼상대자로 인계하면서 앞으로 누구하고도 혼인을 하지 않을 것이며 자신의 사후 모든 상속권을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에게 준다고 분명히 약속했었다.

 

 

프랑스에서 “굴러들어온” 여자 한 사람

 

게오르그 빌헬름이 과연 약속을 지킬 것인지 의구심을 가졌던 것이 현실이 되었다. 누구하고도 결혼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맹세하고 계약까지 했던 게오르그 빌헬름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랑에 빠졌다. 프랑스 귀족가문 출신의 개신교도 엘레노어 돌브레즈라는 여성이었다. 엘레노어는 궁정에서 일하는 상궁(Hofdame)의 지위로 독일에 왔으며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늘 진지한 모습이었으나 하이델베르크의 여성들에게는 질시를 받았다. 가문에 대한 자긍심이 높았던 소피 부인은 시숙(媤宿)이 신분이 낮은 여자에게 연정을 가진 것을 못마땅해 했으며, 질녀인 엘리자베트 샤로테도 엘레노어가 미천한 집안 출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피 부인이 엘레노어에 대해 가졌던 반감은 사실 다른 데 이유가 있었다. 그녀의 시숙 게오르그 빌헬름이 만일 ‘계약’을 파기하여 혼인을 하고 자식이라도 낳게 되면 상속권을 잃게 될 것을 우려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벨펜 집안 4형제 중 맏아들인 크리스티안 루드비히가 사망한 후 게오르그 빌헬름이 상속을 하였고 둘째 아들 요한 프리드리히의 지위는 남편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가 상속받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중이었다. 소피 부인은 벨펜가의 4형제가 분할하여 통치하고 있던 지역을 장차 남편이 통일할 것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게오르그 빌헬름과 엘레노어 사이에서 딸 소피 도로티아(1666~1726)가 태어나면서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소피 부인은 프랑스에서 “굴러들어온” 엘레노어가 스튜어트 가문 출신인 자신과 가족들의 미래를 어떻게 망치는지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비록 딸이라 하더라도 남편이 언젠가 시숙의 영토와 재산을 상속하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힘들게 되었다. 소피 도로티아가 8살이 되던 해에 정식 상속권자로 인정되었을 때 소피 부인과 그녀의 가족들은 크게 분노했다. 소피 도로티아가 제후의 딸 지위를 가지며 제후의 자제와 혼인할 수 있다고 공인된 것이었다. 소피 부인과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는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어 간다고 생각했다. 무언가 대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오랜 기간 간절히 염원해왔던 것을 소피 도로티아가 모조리 무너뜨릴 지도 모를 일이었다.

 

 

 

 

 

제후가문에서 제물(祭物)로 바쳐지는 것

 

독일의 공주들을 아무에게나 마구 주어버리는 것이 다반사(茶飯事)라고 소피 부인은 탄식했었지만 정작 자신의 딸이 그런 운명에 처해지는 것은 굳이 막으려 하지 않았다. 소피 샤로테는 1684년 만 16살도 안된 나이에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의 아들 프리드리히와 혼인을 했다. 벨펜 가문의 신분 상승이라는 목표를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는 소피 부인은 사실 딸의 이 결혼을 내심 반겼다. 딸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했지만 어린 소녀의 개인적인 행복 보다는 현실정치적인 이해관계를 보다 중시했던 것이었다. 1679년 사망한 형(兄) 요한 프리드리히로부터 하노버공(公) 지위를 상속받은 소피 샤로테의 부친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는 선제후(選帝侯)로 승격하기를 바라고 있었으며 소피 부인도 거기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선제후 지위는 각종 특권과 독일왕 선출을 위한 투표권을 가질 뿐 아니라 가문의 명망과 권위를 표상하였다. 1356년에 시행된 금인칙서(金印勅書)는 선제후가 독일왕(王)의 선출권을 가진다고 정했다. 그러나 선제후가 가지는 독일왕 선출권을 보호하기 위해 선제후 지위를 임의로 양도할 수 없고 선제후 지위를 분할하여 상속할 수도 없다고 규정하였다. 그래서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는 다른 아들들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장자(長子)가 모든 것을 상속받는 제도를 마련하려고 시도했다. 장자상속제도는 선제후 국가의 가장 중요한 요건이었다.

 

아우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의 장자상속권 제도에 대해 형 게오르그 빌헬름은 엘레노어와의 결혼을 합법화해주는 대가로 찬성을 해주었고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의 맏아들인 게으르그 루드비히(1660~1727)가 모든 것을 상속받도록 하는 규정이 발효되었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와 소피 부인은 맏아들 게오르그 루드비히와 엘레노어가 낳은 딸 소피 도로티아가 결혼하도록 하였다. 1682년 12월에 거행된 두 사람의 결혼식은 널리 알리지 않고 조용하게 치러졌다. 지체 높은 벨펜 가문의 자제가 단지 상속권이 분할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프랑스에서 굴러들어온 여자가 낳은 딸과 결혼을 해야하는 것이 몹시 수치스럽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선제후가 되기 위한 노력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고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과 같이 선제후 지위에 오른 영방국가와 친교를 쌓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었다. 친교를 맺는 방법으로 혼인 만큼 좋은 정책수단은 없었다.

 

하노버와 브란덴부르크가 사돈이 될 만한 여건은 아직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하노버의 벨펜가(家) 사람들은 이웃 브란덴부르크를 변변치 못한 집안이 벼락출세를 한 것으로 낮추어보고 있었고 브란덴부르크는 이와 달리 하노버 쪽에서 풍겨오는 시기심과 간교함을 감지하고 있는 터였다. 그러나 에른스트 아우구스트가 선제후가 되기 위해서는 다른 모든 여건을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동의가 없이는 안되는 일이었다.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입장에서는 벨펜 가와 같은 연륜있는 귀족가문의 지지를 받는 것이 여러 가지로 유용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던 차에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아들 프리드리히가 상처(喪妻)를 했고 후계자를 낳아줄 새 부인을 찾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왔다. 벨펜가의 소피 샤로테는 젊고 건강했으며 프리드리히의 새 부인으로 최적의 여성이라고 생각했다.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소피 샤로테를 잠시 만난 적이 있었으며 며느리감으로서 손색이 없다는 점을 확신하고 있었다.

 

소피 샤로테와 프리드리히는 결혼하기 2년 전에 잠시 조우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두 사람 모두 상대방에 대해 특별한 감정을 가지지 않았었다. 프리드리히는 당시 20살이었던 부인 엘리자베트 헨리에테(1661~1683)의 간병을 위해 머무르고 있었고 부부는 서로 깊이 사랑하는 사이였다. 엘리자베트 헨리에테는 프리드리히에게는 고모의 딸이 되며 두 사람 모두 외모가 뛰어난 것은 아니었으나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내면서 순수하고 깊은 사랑으로 발전했었다. 네 살 터울의 두 사람은 1679년 결혼하여 딸을 하나 낳고 행복하게 살았으나 결혼한 지 4년 만에 엘리자베트 헨리에테가 당시 유행하던 천연두에 걸려 사망하였다. 프리드리히는 부인의 죽음을 애절하게 슬퍼했다. 선제후 지위를 계승할 아들이 아직 없었으므로 빨리 재혼을 하라는 부친의 성화를 받아들여 프리드리히는 죽은 부인에 대한 생각을 접기로 했다. 프리드리히가 새로운 사랑을 찾기에는 너무 이른 시기였다. 이런 상태의 프리드리히와 소피 샤로테가 결혼을 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