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후부터 동독과 서독의 마지막 만남의 장소가 사라지고 “하나의 조국(das einig Vaterland)"이라는 관념마저 흐려지면서 동독은 ‘국제적인 고립’이라는 불리한 상황에 처했다. 동독이라는 국가는 국제법상 소련과 바르샤바 조약국들에게만 승인을 받고 있었다. 그러다가 1970년대 서독과 동독간의 기본조약(1972)이 체결된 후 동독은 국제적인 고립에서 벗어났고 UN 회원국이 되었다. 서베를린을 포함한 서독 사람들은 이제 동독을 여행할 수 있게 되었고 동독사람들도 ”긴절한 가족관계상의 필요“가 있는 경우에는 서유럽으로의 여행이 허용되었다. 서독의 방송을 대부분의 동독 가정에서 수신할 수도 있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동독’은 과거의 ‘독일’과 어떻게 스스로를 차별화해야 하면서 국가의 존재이유를 찾아야 하는지 고민해야 했다. 그래서 에리히 호네커(Erich Honecker, 1912~1994)는 1971년 6월 울브리히트에 이어 동독 지도자로 취임하는 SED 전당대회에서 ”동독과 서독은 상이한 국가시스템을 가진 상호독립적인 나라로서 불변의 역사법칙에 따라 각각 서로 다른 길을 갈 것“이라고 선언했고 1972년에는 서독을 ”외국(Ausland)"이라고 지칭했다. 울브리히트 시절에는 상상도 못할 표현이었다.
동서독 분단시기 주요국가 지도자들
연도 |
서독(연방수상) |
동독(SED총비서) |
소련(공산당서기장) |
1949 |
콘라드 아데나우어 |
발터 울브리히트 |
스탈린(1924~53) |
흐루시초프(53~64) | |||
1963 |
루드비히 에하르트 |
브레즈네프(64~82) | |
1966 |
쿠르트 키싱어 | ||
1969 |
빌리 브란트 | ||
1971 |
에리히 호네커 | ||
1974 |
헬무트 슈미트 | ||
1982 |
헬무트 콜 |
안드로포프(82~84) | |
체르넨코(84~85) | |||
1989 |
에곤 크렌츠 |
고르바초프(85~91) |
동독은 국가의 정체성을 새로이 정립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1972년부터 정부 차원에서 ‘독일(Germany, Deutschland)'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동독정권에게 ’독일‘이라는 표현은 카이저 시대의 독일 관념과 결부되어 히틀러의 독일까지도 연상시키는 표현이라고 여겨졌다. 그래서 동독정부는 ’독일‘이라는 낱말을 쓴 대신 ’독일민주공화국‘을 의미하는 ’DDR‘이라는 이니셜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요하네스 베허(Johannes R. Becher, 1891~1958)가 쓴 동독 국가(國歌)의 가사말 “폐허에서 일어서다(Auferstanden aus Ruinen)”에 있는 “독일, 하나의 조국”이라는 대목도 공적인 연주에서 들어보기 어려워졌다. 1974년 10월 7일 개정된 헌법에서 동독은 “노동자와 농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계급국가(Klassennation)”라고 새롭게 정의되었다.
동독의 국가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동독정권은 1950년대부터 반파시즘 이데올로기 보다 경제성장 이데올로기를 오히려 더 숭배했었고 1960년대에는 “과학적-기술적 혁명”을 모토로 내세우며 서독에 대한 경제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었다. 1970년대에는 동독체제의 우수성을 증명하기 위해 주민 복지수준에 직결되는 소비재산업의 육성에 힘썼다. 그러나 1980년 경제성장 기조가 무너지고 이 모든 것이 실패로 돌아간 것이 명백해지면서 호네커는 동독의 정체성을 ‘역사’에서 찾고자 하였다. 1983년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탄생 500주년 행사를 정부 차원에서 거행하면서 급진적인 토마스 뮌처(Thomas Müntzer, 1489~1525)에 비하면 어느 의미에서 보수적이라 할 마르틴 루터를 재평가하였다. 1983년은 또한 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 사망 100주기이기도 했으나 루터에 대한 관심이 대체로 더 높았다. 프로이센의 군사이론가 클라우제비츠(Carl von Clausewitz, 1780~1831)도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의 논평과 더불어 재조명을 받았으며, 프리드리히 대왕과 비스마르크에 대한 전기(傳記)도 편찬되면서 그들을 숭상하는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드레스덴의 젬퍼 오페라하우스(Semper-Oper)와 바이마르의 괴테하우스(Goethehaus)가 재건축되고 베를린 중심부 니콜라이 구역(Nikolai-Viertel)은 750년 주년 행사를 성대하게 치러진 것도 1980년대 동독정부에 의해 주도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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