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센 아홉 명의 왕들 가운데 자손을 남기지 못한 왕은 프리드리히 2세(1712~1786)와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1795~1861)입니다. 프리드리히 2세는 동생의 아들인 조카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1744~1797)에게 왕위를 넘겼고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동생인 빌헬름 1세(1797~1888)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습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28살이던 1823년에 엘리자벳 왕비(1801~1873)와 혼인하여 부인과 평생을 함께 하였고 왕비의 극진한 병 간호를 받으며 세상을 떠났었으나 프리드리히 2세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the Great)는 21살이던 1733년에 엘리자벳-크리스티너 왕비(Elisabeth Christine, 1712~1786)와 혼인했으나 두 사람은 거의 평생 동안 별거를 했습니다. 두 사람의 혼인은 프리드리히 대왕의 부친 군인왕(軍人王)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강요에 의한 것이어서 1736년부터 약 4년 동안 라인스베르크성(Rheinsberger Schlosses)에서 왕자를 낳으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자녀를 갖지 못했고 1740년 부친이 타계하자마자 왕과 왕비는 별거를 시작합니다. 프리드리히 대왕이 제위에 오르면 이혼을 할 것이라고 예상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프리드리히 대왕은 이혼을 하지도 않았고 첩실(妾室)을 들이지도 않았습니다.
엘리자벳-크리스티너 왕비에 대하여 시어머니였던 소피 도로티아 왕비(1687~1757)는 “교양이 충분치 않다”고 무시하였고 시누이였던 빌헬르미너(Wilhelmine von Preußen, 1709–1758)는 “대화가 잘 안되는 좀 이상한 사람”이라고 보았습니다. 프리드리히 대왕이 스스로 1747년에 축조한 포츠담의 상수시(sans souci)성에 머무르는 동안 엘리자벳-크리스티너 왕비는 베를린의 쇤하우젠성(Schloss Schönhausen)에 기거를 했습니다. 엘리자벳-크리스티너 왕비가 상수시성을 처음 본 것은 1757년 7년전쟁(1756~1763)의 와중에 오스트리아군이 베를린을 점령했을 때 막데부르크로 가는 피난길에서였습니다. 그래서 프리드리히 대왕 시절의 상수시성은 ‘근심이 없는 곳(sans souci; without concerns, without worries)이었을 뿐 아니라 ’처첩(妻妾)이 없는 곳(sans femmes; ohne Frauen; without wife and concubine)'이기도 했습니다.
베를린의 쇤하우젠성(사진출처 : Sjoehes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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