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마르 공화국’이나 ‘바이마르 헌법’으로 널리 알려진 도시 바이마르(Weimar)는 ‘정치’나 ‘행정’ 하고는 거리가 먼 소도시입니다. ‘바이마르 공화국’이라는 명칭은 황제국가(Kaiserreich)였던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여 왕정이 종식되고 공화국 제헌 의회(Nationalversammlung)가 1919년 2월 6일 바이마르에서 개최되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수도 베를린(Berlin)이 아니고 튀링겐 지방의 소도시 바이마르에서 제헌 의회가 열렸던 이유는 (1)당시 베를린이 각 정파간의 대립으로 극도의 혼란상태에 빠져 있었고 (2)바이마르에 널찍한 궁정극장(Hoftheater)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이마르는 바이로이트(Bayreuth), 뉘른베르크(Nürnberg), 예나(Jena)와 함께 4개의 유력 제헌의회 대체개최 후보도시의 하나였으며 제헌의회 개최일 약 3주 전인 1919년 1월 14일에야 비로소 최종 선택되었습니다. 자칫하면 ‘바이로이트 공화국’이나 ‘예나 헌법’이라는 말이 탄생할 수도 있었겠습니다.
바이마르공화국(1919~1937) 시대의 독일 [그림출처 : Urheber kgberger]
바이마르는 그러나 베틴 가문(Wettiner) 에른스트계 제후들(Ernestiner)의 근거지로서 16세기 초반까지 베를린 못지않은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기는 했습니다.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 von Sachsen, 1412~1464)의 두 아들 에른스트(1441~1486)와 알브레히트(1443~1500)가 라이프치히 분할조약(Leipziger Teilung, 1485.11.11)으로 작센지역을 양분(兩分)한 이후 형인 에른스트가 바이마르에서 작센 서부지역을 통치하고 동생 알브레히트는 드레스덴(Dresden)에서 작센 동부지역을 통치하였으나 작센 선제후 지위(Kurfürst von Sachsen)는 바이마르의 에른스트가 승계했던 것입니다.
튀링겐과 작센왕국(1826~1918) [그림출처 : Mogelzahn]
그런데 에른스튼의 손자인 작센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 1세(Johann Friedrich I. von Sachsen, 1503~1554)가 루터파 신교도로서 카톨릭의 신성로마제국황제 카알 5세를 상대로 슈말칼덴 전쟁(Schmalkaldischer Krieg, 1546~1547)을 벌였다가 패배함으로써 드레스덴의 사촌(Moritz von Sachsen, 1521~1553)에게 선제후 지위를 빼앗깁니다(비텐베르크 항복조인식, Wittenberger Kapitulation, 1547.5.19). 드레스덴을 수도로 한 작센 동부지방이 작센왕국으로 성장하였으나 바이마르와 비텐베르크 등 작센 서부지방은 여러 소공국으로 나뉜 채 통일된 정치군사적 중심지로서의 지위를 되찾지 못합니다. 바이마르가 튀링겐(Land Thüringen, 1920~1952)의 수도(首都)이던 때가 있었지만 인근 에어푸르트(Erfurt)가 프로이센(Freistaat Preußen)에 속하고 있었으므로 ‘튀링겐의 맹주(盟主)였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라이프치히 분할조약(1485)으로 작센이 동서로 분할되고 작센 서부지방이 여러 소공국으로 분열된 것이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약진의 배경이 되었다고 설명하는 견해는 그래서 충분히 수긍이 됩니다.
바이마르 내셔널테아터 괴테/쉴러상[그림출처 : Markv at nl.wikipedia]
바이마르는 독일역사상 ‘정치군사적 중심지’는 결코 되지 못하였지만 18세기 후반부터 “독일정신(Deutscher Geist)의 고향”으로서 ‘문화 중심지’로 갑자기 급부상합니다.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로부터 실레지엔 지방에 대한 통치권을 확실히 굳히고 러시아와 함께 폴란드 분할에 나서면서 욱일승천(旭日昇天)하던 시기의 일입니다. 그 무렵 독일의 내로라하는 작가와 철학자들, 그리고 명망높은 지식인이 되기를 희망하는 젊은이들이 바이마르와 예나대학으로 몰려들었습니다. 발트해 연안 단치히(Danzig; 폴란드 그단스크, Gdańsk) 출신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가 예나대학에서 철학박사 논문을 쓴 것(1813년)도 이런 배경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바이마르가 독일의 ‘문화 중심지’로서 갑자기 떠오른 것은 바이마르-작센-아이제나흐 공국(Herzogtum Sachsen-Weimar-Eisenach)의 공작부인 안나 아말리아(Anna Amalia)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Friedrich der Große oder der Alte Fritz, 1712~1786)에게는 필리피너 샤로테(Philippine Charlotte von Preußen, 1716~1801)라는 4살 적은 여동생이 있었는데 남매는 브라운슈바이크 공국(Herzogtum Braunschweig-Wolfenbüttel) 출신 남매와 1733년 7월 2일 베를린에서 동시에 결혼을 했습니다. 필리피너 샤로테는 브라운슈바이크공(公) 카알 1세(Herzog Karl I. von Braunschweig-Wolfenbüttel, 1713~1780)와 혼인을 했고 프리드리히 대왕은 카알 1세의 여동생 엘리자벳 크리스티너(Elisabeth Christine, 1715~1797)와 혼인을 한 것입니다. 필리피너 샤로테와 브라운슈바이크공 사이에서 1739년 딸이 한명 태어났는데 그녀가 바로 바이마르의 안나 아말리아(Anna Amalia von Braunschweig-Wolfenbüttel, 1739~1807)입니다. 안나 아말리아는 1756년 바이마르공(公)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2세(Ernst August II. Konstantin, Herzog von Sachsen-Weimar-Eisenach, 1737~1758)와 혼인을 했는데 남편은 결혼 후 26개월 만에 사망합니다. 아들인 카알-아구스트(Karl August von Sachsen-Weimar-Eisenach, 1757~1828)가 태어난 지 겨우 8개월이 지난 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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