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센은, 그 역사의 시작이 그러했던 것처럼 마지막 또한, 프로이센이라는 나라에 속하는지 또는 속하지 아니하는지 여부와 전혀 관계없이, 각기 고유의 정체성(identity)을 가지고 있었던 지역(region)들로 구성된 연합체였다. 프로이센이 19세기에 취득했던 지역에서 프로이센의 지역연합체적인 성격이 뚜렷이 나타난다. 프로이센의 실용주의적이고 유연한 행정시스템이 라인지방에 전면적으로 적용되기는 했지만 라인(Rhein) 지방과 베를린은 처음부터 ‘사랑이 없는 결혼(Vernunftehe, Marriage of convenience)'을 했었고 끝까지 사랑이 없는 결혼상태로 남았다. 베스트팔렌(Westfalen) 지방의 경우 역사적으로 통일성을 가져본 적이 없는 지역이었으나 19세기 후반 이후 지역적인 결속이 강해졌다. 베스트팔렌의 파더본(Paderborn)과 같은 카톨릭 지역에서는 1870년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전쟁시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고 자발적으로 참전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으며 징집을 피해 네덜란드로 피신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런 점에 비추어, 라인란트 지방이 1815년 이후 프로이센에 동화(assimilation)되었다고 보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없지 않다. 프로이센의 서부 지역은 프로이센에 동화(同化)되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새롭게 재편된 것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라인지방 등에 주정부(Oberpräsidien)와 주의회(Provinziallandtag)와 같은 프로이센의 행정시스템이 시행됨으로써 역설적이게도 해당 지방의 향토의식 또는 정체성이 오히려 강화되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이런 효과는 오스트리아와의 전쟁 이후 프로이센의 영토가 확장되면서 더욱 증대되었다. 많은 지역에서 프로이센에 병합되는 것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들 지역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하노버였는데 하노버의 보수세력은 비스마르크 정부가 오랜 역사를 가진 벨펜(Welfen) 왕가를 폐지하고 그 영지(領地)를 몰수한 것을 도저히 수긍할 수 없었고 이를 대역죄(大逆罪)라고까지 여겼다. 이런 생각을 가진 보수파들이 독일-하노버당(Partei der Deutsch-Hannoveraner)을 결성하고 벨펜 왕정의 복고(復古)와 보수주의적 지역주의적 이념을 실현하고자 했다. 벨펜 왕가를 받드는 하노버사람들은 나중에는 결국 민족주의에 심취한 ‘독일사람(Deutsche)’이 되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단 한번도 스스로를 진정한 ‘프로이센사람(Preußen)'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이들 하노버 보수파에 대항하는 정치세력으로서 비스마르크 정부를 지지하는 ’독일 민족자유주의자당(Nationalliberale Anhänger Deutschlands)'이 활동하고 있었으나 해당 정당의 이름에 나타난 바와 같이 독일(Deutschland, Germany)의 정당일 뿐 프로이센(Preussen, Prussia)의 정당은 아니었다. 그들은 비스마르크가 통일독일의 일원(Deutsche Mission)으로서 활약한 것에 대해서는 환호를 보냈지만 ‘프로이센적인’ 것에 대해 지지한 것은 아니었다.
프로이센의 영토가 마지막으로 크게 확장되었던 시기는 우연히도 독일 전역에서 지역의식이 크게 고조되었던 시기와 일치하였다. 이 시기에는 각 지역의 명망가들을 좌장(座長)으로 하여 해당지역의 문화, 정치, 언어에 대한 고고학적, 역사적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지역의 경우 1866년 프로이센에 병합된 이후 지역에 대한 연구가 보다 활발해졌다. 1919년 덴마크에 귀속되게 되는 북(北)슐레스비히 덴마크어 사용지역 뿐 아니라 독일어 사용지역을 포함한 슐레스비히-홀스타인 전역에서 자치권(自治權)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이 시도되었다. 1867년 북독일연방 제국하원에서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출신 의원 대부분이 자치권 인정 안건에 찬성하는 입장을 보였다. 슐레스비히-홀슈타인-라운엔부르크회(Schleswig-Holstein-Lauenburgische Gesellschaft)와 같은 학술단체는 지역사 연구 활동을 통해 정치적인 주장을 적극 뒷받침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지역주의 경향은 일정한 수준 내에 머무르고 있었다. 지역의식이 점차 고조되고는 있었지만 프로이센의 권위를 직접 위협하는 수준은 아니었던 것이다.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사람들은 불평은 좀 할 지언정 프로이센에 대한 납세의무와 병역의무를 충실히 이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별 정체성이 강화되는 현상을 주의깊게 살펴보아야 할 이유가 있었다. 지역별 정체성은 프로이센 정부를 전복시키는 잠재력을 가졌다는 측면 보다는 리저널리즘(regionalism)이 내셔널리즘(nationalism)과 결합되었을 때 예상되는 시너지 효과(synergy effect) 때문에 중요했다. 현대적이면서 대중적인 고향의식(故鄕意識) 또는 고향이데올로기(Heimatideologie)는 문화적으로나 인종적으로 단일한 통일국가 독일에 대한 관념과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었다. 지역별 정체성과 단일민족 통일국가 이념이 결합되는 과정에서 프로이센의 비(非)유기적인 국가구조가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질 수 밖에 없었다. ‘프로이센’의 정체성이 약화된 것은 말하자면 위로부터 내셔널리즘이 확산되었고 아래로부터는 리저널리즘이 강화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브란덴부르크 지방(Mark Brandenburg)까지도 도시화된 베를린과는 별개로 해당지역의 정체성을 형성했으며 브란덴부르크는 프로이센이라는 지역연합체를 구성하는 지역임과 동시에 통일독일의 일원(Deutsche Mission)이라는 양면적인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독에서 보낸 나의 40년 (Günter de Bruyn) (0) | 2010.08.26 |
---|---|
The Awful German Language (by Mark Twain) (0) | 2010.08.24 |
갈색(brown)의 독일통일 (by Harold James) (0) | 2010.08.18 |
프로이센 공화국과 독일 사민당 (by Christopher Clark) (0) | 2010.08.16 |
오딘(Odin/Wotan)과 파프너(Fafner)의 1871년 독일통일 (by H. James) (0) | 2010.08.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