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국가사회주의(Nationalsozialismus)에 대해 체계적으로 서술을 하거나 역사적인 해석을 해내는 것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나열하는 것은 훨씬 쉽다. 국가사회주의 집권 당시 전쟁이 일어났고 집단살인이 있었으며 국가사회주의는 그 전쟁에서 졌다. 1945년 전쟁이 끝난 후 독일의 주권은 파괴되었으며 ‘독일인들의 민족의식’에는 전범(戰犯)이라는 오명(汚名)이 늘 따라다녔다. 1933년부터 1945년까지의 기간 동안 독일민족과 국가사회주의는 동일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국가사회주의는 이론적으로 명확하지 않고 다양한 내용을 내포하고 있어서 여러 가지 정치적, 문화적, 사상적 형태와 쉽게 결합될 수 있었다. 나치온(Nation)이라는 개념은 제3제국 시대(1933.1.30~1945.5.8)에 적극 활용되어 1945년 이후까지도 제3제국의 색깔을 완전히 씻어내기 어려웠던 수많은 도구개념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국가사회주의는 여러 가지 이념적 정책적 내용을 섞어서 마치 하나의 정치이념인 양 이름을 붙여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가되었다. 전후 독일에서는 보수(保守)주의, 민족의식, 반공(反共)주의, 자유주의, 사(私)기업주의, 경제계획, 사회주의, 환경보호운동 등을 폄하(貶下)하기 위해 제3제국 시절 국가사회주의와의 관련성을 따지곤 했다.
국가사회주의가 끊임없이 변모하는 운동(movement)으로서의 성격을 가졌다는 점도 그 본질을 파악하기 어렵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 국가사회주의가 핵심 원리(doctrine)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되기는 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누구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국가사회주의는 사이비 종교가 가진 온갖 특징을 다 가지고 있었다. 국가사회주의에는 사이비 종교에서 발견되는 숭배(崇拜), 의식(儀式), 주문(呪文), 사제(司祭) 그리고 거대한 규모의 교구(敎區)가 있었다. 국가사회주의가 실체를 감추고 왜곡하는 메커니즘 또한 사이비 종교를 닮았다. 사제(司祭)의 교활함과 교구민(敎區民) 일부의 우둔함이 잘 맞아떨어진 시스템이었다.
국가사회주의는 끊임없이 얼굴을 바꾸었다. 1919년 뮌헨에서 나치당이 결성된 이후 강령내용과 지역적 기반 및 지지계층은 계속 바뀌었다. 1920년대 초반 국가사회주의의 가장 명백한 이념요소는 반(反)유대주의였다. 그러나 1930년대 나치의 지지층이 확대되던 시기에는 반유대주의가 그다지 부각되지 않았다. 중산층이나 기업인들의 지지를 호소하는 자리에서는 오히려 반유대주의가 의도적으로 감추어졌으며 반유대주의 경향을 오래 유지해 온 일부 농촌지역에서는 반유대주의를 전면에 내세우기도 했다.
1920년 나치당의 ‘25개 항목 강령’에는 사회주의적인 요소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대지주 소유 토지의 수용, 대규모 기업집단의 국유화, 예속농노제(Zinsknechtschaft)의 철폐 등의 내용이 제시되어 있었다. 1920년대 후반부터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는 상공인(商工人) 계층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애썼다. 뮌헨의 토착 기업인들과의 접촉을 강화하였고 1926년 함부르크의 보수적인 상공인 모임에는 연미복(燕尾服)을 입고 참석했다. 1932년 라인란트 지역 상공인들이 모인 뒤셀도르프 모임에서는 중산층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 검정색 양복을 입었고 1933년 연방총리로 취임하는 자리에서는 연미복을 입었다. 상공인 외에 다른 사회계층의 지지를 확보하려는 나치당의 시도도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당시 베를린 지역당 책임자였던 괴벨스(Joseph Goebbels, 1897~1945)는 히틀러에 비해 유복했던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대부분 임금노동자 스타일로 행동했다. 한편, 슐레스비히-홀슈타인과 같은 지역에서 나치당은 전통적인 농민운동을 하는 정당의 모습을 보였다.
나치 추종자들의 구성도 1920년대 초반부터 차츰 달라졌다. 나치당이 결성된 1920년대에는 바이에른 지역의 카톨릭교도가 주요 지지층이었다. 나치당은 당시 제1차 세계대전 패배 이후의 혼란기에 반(反)사회주의를 표방하였던 시민운동그룹(Bürgerwehren)의 과격파 단체의 하나로 분류되었다. 1928년 이전까지 나치당 지지자들은 대부분 도시지역에 거주했으나 나치당이 가지는 정치적인 영향력은 아직 미미했다. 북독일의 인종주의적 군소정당과의 통합도 나치당의 영향력을 강화시키지는 못했다. 1924년 이후에는 한때 득표율이 오히려 감소하기도 했었다. 1928년 이후 나치당의 득표율이 현저하게 증가했던 것은 농촌지역 유권자들에게 적극적으로 파고들었던 선거전략의 결과였다. 당시 독일 농촌경제는 가축의 판매가격이 지속적으로 하락하는데 비해 이자와 세금 부담은 늘어나고 있어서 농민들은 1927년 소요사태를 일으키기까지 했었다. 경제위기가 계속되면서 독일 북부와 동부 지방에서의 나치 지지율이 바이에른 지방에서의 지지율을 넘어섰다.
나치추종자들의 사회경제적 배경이 달라진 것은 나치당의 선거전략을 반영한다. 나치는 유권자에 따라 의도적으로 이데올로기를 변경시켰다. 때와 장소에 따라 상이한 얼굴을 하고 등장하는 나치당의 카멜레온식 전략은 1923년 히틀러가 시도했었던 쿠데타 보다는 선거에서 높은 득표율을 얻음으로써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목표였다. 독일 농촌지역을 휩쓴 경제문제로 인하여 독일농민들은 나치당의 거수기(擧手機)가 되어갔다. 1933년 직전에 나치당의 득표율은 급속히 상승했다. 1928년 연방하원 선거에서 2.6%에 그친 나치당의 득표율은 1930년 9월 18.3%로 상승했고 1932년 7월에는 37.4%에 이르렀다. 나치당의 카멜레온식 선거전략으로 인해 히틀러가 집권하는 경우 대체 어떤 정책을 시행할 것인지에 대해 누구도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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