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센이라는 이름의 국가는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앞으로도 영영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프로이센은 같은 방법으로 두 번 희생을 당했다. 첫번째는 독일인들이 수백년 동안 염원했던 독일통일이 실현되었던 때였고, 두번째는 나치주의자들의 망상 때문에 저질러진 악행에 대한 속죄양으로 프로이센이 지목되었을 때였다.
희생정신(犧牲精神)은 의심할 여지없이 프로이센적인 덕목(德目)의 하나이다. 그러나 프로이센의 소멸을 초래한 두 번의 희생은 모두 잘못된 판단의 결과였다. 1871년 빌헬름 1세는 프로이센에 의해 독일이 통일되어 자신의 지위가 프로이센 국왕에서 독일제국 황제로 바뀌게 되었을 때 그것이 곧 프로이센이라는 국가의 소멸로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1947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연합국은 프로이센을 지역별로 분할하여 소멸시키면서 프로이센 이외의 지역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대한 조치를 취하였다.
어떤 잘못된 판단이 있었던 것일까? 1871년의 경우 전쟁분위기가 고조되어 있던 당시 국제정세 속에서 독일통일의 의미를 지나치게 과대평가한 잘못이 있었다. 1947년의 경우에는 프로이센의 성장발전과정에서 프로이센이 실제로 추구하고 실행한 국가목표와 정책수단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한 잘못이 있었다. ‘수움 쿠이크베(suum cuique)' 즉, 모든 신민(臣民)에게 자기 몫을 나누어 준다는 국가이념을 표방하면서 절도(節度)의 미덕을 함양하여 성공을 거둔 프로이센에 대한 대내외 평판이 반드시 긍정적이지는 않았다. 독일의 제도와 습속(習俗) 가운데 자국의 이해(利害)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들을 모두 프로이센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규정짓고 폄하(貶下)하는 분위기가 오래전부터 존재했었다.
프로이센은 군국주의(軍國主義)의 화신(化身)으로 비쳐졌지만, 독일 내의 다른 영방국가(領邦國家)들 또한 마찬가지로 전쟁을 철저히 대비했었다는 점은 간과되어 왔다. 동맹을 맺고 전쟁하는 것을 프로이센이 거부했을 때 영국과 같은 다른 유럽국가들이 혹독히 비난했던 역사적 사실도 잊혀졌다. 예를 들어, 러시아를 상대로 영국, 프랑스 등 연합국이 싸운 크림전쟁(Crimean War)에 참전하기를 거부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주로 선제공격에 의해 큰 성과를 거둔 프리드리히 대왕 보다 더 나쁜 평가를 받았다. 군국주의는 프로이센의 국가기본전략의 하나로 간주되어 중시되었지만 대부분 매우 조심스럽게 운용되었다. 프로이센 군대의 실질적인 창설자이면서 ‘군인왕(軍人王)’이라는 칭호를 가진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계약상의 의무로 인하여 하는 수 없이 군대를 지원하였던 예외를 제외하면 평생 단 한번도 전쟁을 벌인 적이 없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도 군인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처럼 전쟁을 피하려고 애썼다. 그는 군인들을 좋아하기는 했으나 평화주의에 입각한 선언문을 직접 작성하기도 하였고 평화를 지키는 왕으로 남기를 바랬다. 전쟁을 하는 것은 어떻게든 피해보고자 하였으므로 동맹국이 되어 국제전에 참가하기를 권유하는 수많은 다른나라 외교사절의 압박을 받아야 했다. 그런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를 나폴레옹과 처음부터 정면으로 맞서서 싸워야 했던 시대적 요청을 저버린 무능한 군주라고 평가하는 것은 세계역사상 가장 가혹한 인책론(引責論)라고 할 수 있다.
나폴레옹이나 또는 히틀러와 같은 인물을 프로이센은 배출한 적이 없었다. 항상 큰 위험을 감수하며 도모(圖謀)했고 또 대부분 성공을 거두었던 프리드리히 대왕 마저도 결코 전횡(專橫)을 행사하는 통치자가 아니었다. 프리드리히 대왕이 점령한 지역에서 징발한 식량이나 말 또는 노동력에 대해서는 항상 상응하는 대가가 지급되었다. 프리드리히 대왕에게는 나폴레옹이나 히틀러에게 적법한 재판절차 없이 총살당한 앙기엥공작(Herzog von Enghien)이나 에른스트 룀(Ernst Röhm) 같은 인물도 없었다. 프로이센은 전투에 나서는 장병들이 발을 맞추어 행진하도록 하고 또 모두 군복(軍服)을 착용하도록 한 최초로 나라들 중 하나였다. 행군과 군복은 지휘관의 통제를 용이하게 했을 뿐 아니라 아군이나 적군 모두에게 프로이센 군대 모든 구성원이 누리는 공평성을 좀더 부각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프로이센 스스로 자랑스럽게 표방했던 프로이센의 광영(光榮)은 그러나 군인의 옷차림처럼 모두 동일한 것이 아니었다. 프로이센의 광영을 만들어낸 프로이센 왕들의 면면(面面)은 오히려 다양한 저마다 독특한 색깔을 가지고 있으며 너무도 개성이 뚜렷한 사람들로서 어떤 왕도 다른 왕과 동일시 되지 않는다. 프로이센 아홉명의 왕들이 모두 프리드리히 대왕과 같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것은 잘못이다. 프리드리히 대왕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무슨 일에서든 철저히 매달리는 법이라곤 없었던 사람으로서 프리드리히 대왕과 정반대였으며 19세기 독일 자유주의자들이 큰 기대를 걸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아쉽게도 불과 99일을 재위에 머무르다가 세상을 떠났다. 프리드리히 1세는 예술적인 재능을 타고 났으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예술적인 소양이 전혀 없었고,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말수가 적었던데 비해 빌헬름 2세는 호언(豪言) 하는 것을 좋아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낭만적인 몽환(夢幻)의 세계를 동경하였으나 그의 동생 빌헬름 1세는 시민의 자세로 현실세계를 살면서 ‘발포명령을 내린 황태자’라는 젊은 시절의 오명을 딛고 국민들로부터 신망받는 통치자의 반열에 올랐다. 이렇듯 프로이센은 그 옹호자들이나 비판자들이 항용 도식화하여 규정짓는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프로이센의 국기(國旗) 또한 마찬가지로 흑색과 백색을 이용하여 만든 오직 하나의 형태가 있었던 것이 아니고 여러 가지 색깔을 사용하여 다양한 형태로 바뀌면서 존재했었다. 군대에서 사용한 국기 가운데는 여러 가지 빛깔을 조합하여 금이나 은 자수로 장식한 것이 있었다. 프로이센의 국기 형태에서 조차 전형적인 프로이센 방식이라고 말할 만한 공통분모가 아예 없다.
요컨대 프로이센이라는 나라는 여타 다른 나라와 특별히 다른 점이 없었다. 다른나라에 비해 절도(節度)가 좀더 있고, 좀더 목표지향적이었으며 그 결과 좀더 큰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이 다른나라들과의 차이점일 뿐이었다. 프로이센의 통치자들이 다른나라 통치자에 비해 보다 엄격하게 국가를 다스렸다고 흔히 말해지고 있지만 그 말은 곧 프로이센에서 다른나라에 비해 보다 공정한 법집행이 이루어졌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엄격하게 공정성을 견지하는 것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지만 엄격한 공정성 만으로 지상의 낙원이 건설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과연 어떤 나라가 지상의 낙원을 건설하는데 성공했다고 할 수 있을까? 최소한 그것을 표방하기라도 한 나라는 또 얼마나 될까? 프로이센 군인들의 버클(buckle)에 새겨진 ‘수움 쿠이크베(suum cuique)'를 실현한 나라는 제법 될 지 모른다.
이미 소멸된 국가 프로이센이 비록 문예작품 속에서나마 재음미되는 이유는 모든 신민(臣民)에게 자기 몫을 나누어 준다는 ‘수움 쿠이크베’의 소박한 국가이념 속에서 무엇인가 위대한 것, 이상적인 것, 그리고 실현될 수 없는 것이라는 의미의 환상(幻想)을 발견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소박한 국가이념은 많은 것들을 여전히 수수께끼처럼 휘감고 있다. 과거에 천착하다가 우리는 어느 사이에 불현듯 현재로 돌아와 있음을 알게 되고 그 현재는 항상 자신의 시대정신만으로 모든 과거를 해석한다. 테오도어 폰타네(Theodor Fontane)의 가장 프로이센적인 소설 ‘부테노우의 샤흐(Schach von Wuthenow)'에서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수수께끼는 어떻게 풀리지? 그것은 결코 풀리지 않아. 암흑(暗黑)과 미명(未明)의 일부는 늘 남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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