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
게오르그 빌헬름의 아들로 선제후 자리를 이어받은 사람이 프리드리히 빌헬름(1620~1688)이다. 20세에 선제후가 된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이후 약 50년 동안(1640~1688) 통치하면서 약소국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운명을 완전히 바꾸어 놓음으로써 독일 역사상 ‘대선제후(Great Kurfürst)’로 불리운다. 30년 전쟁이 한창일 무렵 15세의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신변의 안전을 지킬 겸 선진적인 문물을 익히도록 외가친척이 되는 네덜란드 왕실로 보내졌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어머니 엘리자베트 샤로테 폰 팔츠(1597~1669)는 네덜란드의 공주로서 독일 팔츠(Pfalz)로 시집을 온 루이저 율리아너(1576~1644)의 딸이며, 보헤미아의 '겨울왕(Winter King)'으로 불리면서 30년 전쟁을 촉발시킨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4세의 여동생이다.
당시 네덜란드의 오렌지 가문은 유럽 최고의 명망높은 가문이였으나, 이에 비해 브란덴부르크의 호헨촐레른 가문은 명망도 미미했고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네덜란드 유학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 식사비용를 줄여야 했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곤궁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오렌지공(公) 프레데릭 헨드릭(1583~1647)는 독일로 시집간 누나의 손자가 되는 프리드리히 빌헬름을 따뜻이 맞이해주었고 라이덴과 아른헴에서의 대학공부를 포함하여 네덜란드에서 3년 동안 머무를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네덜란드의 경제적인 풍요로움과 네덜란드인의 사고방식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1625년부터 네덜란드를 통치한 오렌지공 프레데릭 헨드릭은 건축과 미술에 대해 재정적인 후원을 했으며, 유럽 전체 캘빈파 신교도들의 영도자이기도 했다.
독실한 캘빈주의자였던 오렌지공 프레데릭 핸드릭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신념을 가지고 하늘의 뜻을 지상에 실현하는 ‘신(神)의 조력자’가 되고자 했다. 그의 통치시기에 네덜란드는 상업과 금융업, 재정과 조세행정, 무역정책과 식민지정책 등 분야에서 유럽의 선도국가가 되었고 유럽의 다른 제후국들은 네덜란드의 사례를 배우고자 하였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18세가 되어 베를린으로 돌아왔을 때 브란덴부르크는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도시는 파괴되어 있었고, 굶주린 백성들은 개, 고양이, 쥐를 잡아먹고 연명하고 있었고 심지어 인육(人肉)까지 먹는다는 풍문도 나돌았다. 브란덴부르크 어디에서도 농사를 지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경작지는 황폐해졌고, 농부들은 죽음을 당했으며, 군대에서 탈영한 군인들이 도적떼가 되어 온 나라를 휩쓸고 다녔다. 희망과 용기를 잃은 나라에는 체념만이 쌓여갔다.
이런 상황속에서 1640년 선제후가 된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도저히 해결할 방법이 없어 보이는 문제와 마주서게 되었다. 그의 부친은 그에게 황폐해진 땅과 텅 빈 곳간만을 유산으로 남겨주었다. 브란덴부르크는 어떻게든 재건이 되어야 했으나, 비단 브란덴부르크 뿐만 아니라 호헨촐레른 가문이 통치하고 있는 다른 네 곳도 재건의 손길이 필요했다. 호헨촐레른 가문의 클레브, 마르크, 라벤스부르크, 브란덴부르크 그리고 프로이센은 거리상으로 서로 멀리 떨어져있을 뿐 아니라 행정, 종교, 경제여건, 신분제도가 모두 상이했다. 당시의 신분(身分)은 특권층을 형성하고 있었던 귀족, 성직자, 그리고 자유시민 등 세 집단으로 나뉘었다. 각 신분집단은 선제후에 대해 자신들의 집단적 권리와 자유를 보장받기 위해 잘 조직화되어 있었다. 각 신분집단은 선제후의 조세징수에 대해 이를 승인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어서 선제후의 재정상태는 각 신분집단에 의존적이었으며 이것이 신분집단의 권력과 영향력의 원천이었다. 그러므로 피폐해진 국가를 재건하기 위해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선제후가 해야 할 가장 시급한 과제는 선제후의 발목을 잡으려는 각 신분의 집단이기주의를 제압하는 일이었다. 아울러,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다섯 지역을 어떤 방식으로든지 통합하여 하나의 통일된 국가로 역량을 결집시키는 방안을 강구해야 했다.
절대주의 통치체제의 구축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네덜란드의 오렌지공과 같은 캘빈파 개신교도였으며 열심히 노력하고 의무를 다하는 것이 신의 뜻이라는 캘빈주의적인 교육을 받았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그는 전쟁의 참상에서 국가를 구해내고 스스로의 권력기반을 구축하는 일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네덜란드 외증조부의 궁정에서 상비군(常備軍) 제도를 처음 접했다. 상비군은 유사시를 대비하여 항상 전투태세를 가지고 있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전쟁이 시작되면 모집되었다가 전쟁이 끝난 후에는 해산되는 용병(傭兵)에 비해 엄청나게 많은 비용이 든다는 단점이 있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상비군을 유지할 만한 돈이 없었고 각 신분집단은 선제후의 권력을 강화시키고 자신들의 지위는 약화시킬 것이 분명한 상비군의 창설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각 신분집단은 선제후로부터 막대한 경제적인 특혜를 보장받고 나서 상비군 창설을 승인하였다. 융커라고 불리우는 토착귀족 집단의 경우에는 이를 기화로 봉건영주로서의 권리를 비약적으로 확대하였다. 1653년의 신분회의에서는 융커들에게 곡물, 목재, 모직물 수출에 대한 세금면제, 자유롭게 사냥할 권리 등 특권이 광범위하게 부여되었으며 농민이 소유하는 농지에 대해 봉건영주인 융커가 일방적으로 소유권을 이전받는 것(Bauernlegen)을 합법화해주었다. 봉건영주가 농민의 토지소유권을 일방적으로 폐지하는 것이 합법화됨에 따라 봉건영주(Gutsherren)에게 예속된 농노(農奴, Leibeigenschaft)가 일반적인 형태로 간주되었으며 농민이 농노가 아님을 주장하려면 스스로 농노가 아니라는 점을 입증하도록 했다. 당시의 농민들이 이를 입증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로써 자영농민층은 사실상 소멸되었으며 상비군 창설에 대한 승인의 대가라고 하기에는 융커들에게 너무나 큰 특권이 부여된 셈이었다.
중상주의적 경제정책만으로 재정적인 수요를 모두 충당하기는 불가능하였으므로 상비군을 창설한 이후 한동안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선제후는 재정적으로 곤경에 처했다. 그러나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국가의 재정형편이 어려워지면 세율을 인상하거나 새로운 세목을 신설하는 것이 당시에도 일반화된 관행이었다. 이 문제에 대해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역시 네덜란드 유학시절에 알게 된 간접소비세(Akzise; Excise)를 도입하는 방법으로 대처하였다. 간접소비세는 주로 생활필수품에 부과되었으며, 국가는 상인으로부터 세금을 징수하고 상인들은 세금상당액을 물건가격에 포함시킴으로써 최종적인 세금부담은 소비자들에게 귀속되었다.
간접소비세 외에 클레브, 마르크, 라벤스부르크, 브란덴부르크, 프로이센 등 각 지역에서는 베를린 중앙정부에 ‘분담금’ 명목으로 직접세를 징수하여 이관하였다. 직접세의 부과징수는 귀족이나 봉건영주와 같은 신분집단이 아닌 국가기관에서 직접 담당하였다. 국가의 통치자인 선제후가 직접 지휘하는 통일된 공무원조직이 형성되어 신중함, 정확함, 근면함, 책임감 등 흔히 말하는 프로이센의 미덕(preußische Tugenden)을 낳은 산실(産室)이 되었다.
공무원조직을 유지하는 것도 국가의 재정적 부담을 가중시켰다. 세금의 부과징수는 강력히 집행되었으나 상비군을 유지하는 비용을 감당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하였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즉위 당시 고작 5천명도 되지 않았던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군대는 1688년 임종하던 해에 3만명까지로 늘어났으며, 30년 전쟁의 피폐로부터 천천히 벗어나고 있는 작고 가난한 나라의 군대로는 엄청난 대규모였다. 이런 이유로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은 외국의 원조도 받았다. 특히 프랑스로부터의 원조금액이 적지 않았지만 군대 자체의 비용절감 노력이 불가피했다. 프랑스 절대왕정 시대의 군대와 비교할 때,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군대의 급료, 옷, 음식은 대개 열악했으나 훈련이나 규율 및 징벌은 보다 가혹했었다.
귀족들은 각종 세금을 면제받았다. 그 대가로 프리드리히 빌헬름 선제후는 귀족의 자제들을 군대나 공무원조직에서 단위조직의 책임자급으로 복무하도록 요구하였다. 처음에는 귀족자제들이 이러한 의무복무를 꺼리는 경향이 없지 않았으나 차츰 귀족자제의 복무의무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많은 귀족가문들이 자식들을 부양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빈곤했는데 이 경우 군대가 자연스러운 해결책이 되었다. 장교들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던 사람들이 농촌지역에 거주하는 향토귀족의 자제들이었으며 이들은 군대에서 장교의 지위가 주어지는 것을 반겼으며 국가를 위해 복 무한다는 점에 대해서도 자부심을 가졌다. 장교로 복무하는 귀족자제들의 엘리트의식이 형성되기 시작하면서 호헨촐레른 가문의 국가와 브란데부르크-프로이센의 귀족들 간에는 군대를 매개로 하여 봉건주의적인 주종관계와 유사한 연대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귀족자제의 군대 또는 행정기관 복무를 요구함으로써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한편으로는 ‘국가’라는 이름으로 귀족계급이 독자적인 정치세력화 하는 것을 제어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복무를 마친 귀족자제들을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사회지도층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30년 전쟁의 깊은 후유증은 여전히 치유되지 않고 있었으며,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브란덴부르크가 잿더미 속에서 빠져나와 차츰 힘을 회복하는 방안을 강구하느라 노심초사했다. 이 어려운 과제는 역시 네덜란드 유학시절 알게 된 총명한 여성 한 사람의 도움이 컸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네덜란드에서 알게 된 것은 상비군이나 간접소비세 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첫 번째 부인 루이저 헨리에테 폰 오란니엔(1627~1667)도 네덜란드에서 알았던 것이다.
“부인, 당신이 직접 통치하시오” - 선제후부인 루이저 헨리에테
루이저 헨리에테(1627~1667)는 네덜란드 오렌지공 프레데릭 헨드릭의 장녀로서 그녀의 어머니는 독일 헤센지방 귀족가문 소름스-브라운펠스 출신 아말리에(1602~1675)였다.
19세의 나이에 사랑하지도 않는 친척 프리드리히 빌헬름과 혼인을 하고 유복한 네덜란드 친정을 떠나 가난하고 피폐한 브란덴부르크로 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아버지의 뜻을 따랐던 것이며 도저히 피할 방법이 없어서 받아들인 결혼이었다. 당초 스웨덴의 여왕 크리스티나(1626~1689)와 정략 결혼을 하고자 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에게도 그녀는 결혼상대자로서 두번째의 선택이었다. 당시 유럽의 정세로 보아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이 네덜란드와의 유대를 더욱 강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인식되었고 프리드리히 빌헬름과 루이저 헨리에테의 혼인은 그러한 정치적 필요성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네덜란드 출신의 우아한 신부 루이저 헨리에테는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경제적으로 낙후된 시댁에 곧 마음을 붙였다. 독일어를 새로 배우는 일이 고역이었고 결국 임종시 까지도 유창한 독일어를 구사하지는 못했지만 당시 유럽의 궁정에서는 프랑스어를 쓰는 것이 유행이었으므로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루이저 헨리에테는 온화하고 사랑스러운 여성이었을 뿐 아니라 의지력이 강하면서 친정부모에게서 물려받은 탁월한 정치적 감각까지 갖추고 있었으므로 독일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하지 못한다는 점이 옥에 티가 되기는 했다. 그녀는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대부분의 호헨촐레른 가문 남자들처럼 다혈질에 갑자기 불끈 화를 내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알아차렸고 남편의 그런 성향으로 인하여 주위사람들이 뜻밖의 낭패를 당하지 않도록 조정하는 일에 탁월한 수완을 보였다.
약 20년 동안 선제후의 부인으로 지내면서 그녀는 단순한 내조자 이상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재건이라는 어려운 과제와 씨름하는 남편의 믿음직한 자문관이었으며 전쟁 후 인구가 격감한 지역에 친정국가인 네덜란드 이주민을 받아들여 정착시켰고 네덜란드의 선진적인 농업기술, 운하기술, 화훼재배기술 등을 이식하였다. 전쟁으로 파괴된 베를린도 프리드리히 빌헬름 통치시에 재정비되기 시작했다. 1648년 6월에 베를린성(城)이 네덜란드풍(風)의 바로크양식으로 리모델링되었고 다른 건물들도 보수작업이 계속 이어졌다.
루이저 헨리에테는 그녀가 수행해야 할 과제에 대해 늘 진지한 자세로 임했으며, 다소 지나치게 집중하는 바람에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했다. 깊은 우울감에 빠져있던 그녀가 어느 지인에게 쓴 편지에서는 남편이 필요로 하고 또 행복해질 수 있다면 자기 목숨이라도 기꺼이 주고 싶다고 적기도 했다. 그녀의 이러한 숙원은 결혼한지 12년이 지났을 무렵 어느 정도 실현되었다. 부부가 합심하여 국가적인 과제를 해내는 동안 부부관계는 더욱 돈독해졌으며 당초 정치적인 고려에 의해 정략결혼으로 출발했던 두 사람 사이는 행복한 부부로 바뀌었다. 건강상태가 좋지 못했던 루이저 헨리에테는 6명의 자녀를 낳았으며, 훗날 최초의 프로이센왕(王)이 되는 병약했던 셋째 아들 프리드리히를 제외하고 모두 20세 이전에 사망했다.
불안정한 건강상태, 빈번한 임신과 유산에도 불구하고 루이저 헨리에테는 남편의 여행에 늘 동행했고 간혹 전장(戰場)에도 따라나갔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그녀의 의견이나 제안을 중요하게 받아들였고 특정 사안에 대한 그녀의 의견을 듣기 위해 신하들이 모여있는 회의장을 떠나는 경우도 자주 있었다. 그런 만큼,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언젠가 한번 크게 분노하여 선제후관(冠)을 벗어 마룻바닥에 집어던지면서 모든 것에 대해 잘 아는 그의 부인더러 선제후 노릇을 하라고 소리쳤다고 하는 풍문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 “나는 이 선제후관(冠) 대신 다른 장식품이나 하나 달고 다닐테니, 이제 부인이 직접 통치를 하시오!”
루이저 헨리에테가 겨우 3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을 때,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슬픔은 컸다. 그녀가 남기고 간 빈자리는 재혼을 해도 결코 채워지지 않을 것임을 아는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절망하며 소리쳤다. “루리저, 루이저, 이제 누가 당신을 대신한단 말이오!” 루리저 헨리에테 사후 두 달 남짓 후에 선제후는 전혀 다른 성격의 도로티아와 재혼을 했으며, 두 번째 부인 도로티아는 첫 번째 부인 루이저의 빈자리를 채워줄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네덜란드 건축양식으로 1651년에 지어진 베를린 근교의 오라니엔부르크성(城)에는 역사적으로 매우 의미있는 제1대 프로이센왕(王)의 어머니 루이저 헨리에테를 오늘날까지 기리고 있다.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프리드리히 1세의 妻家 하노버家門 (by 카린 포이어슈타인-프라서) (0) | 2010.07.06 |
---|---|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로이센왕이 되는 순간(by Karl Eduard Vehse) (0) | 2010.07.05 |
프로이센을 위한 변명(by Heinz Ohff) (0) | 2010.07.03 |
프로이센의 시작과 끝(by 카린 포이어슈타인-프라서) (0) | 2010.07.03 |
From Prussia with love (0) | 2010.07.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