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코페르니쿠스의 고향 서(西)프로이센

뇌하수체 2010. 9. 16. 20:11

유럽지도를 펼쳐보면, 독일 수도 베를린은 독일 북동부에 많이 치우쳐 있고 독일의 이웃나라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는 동쪽으로 많이 치우쳐 있습니다. 그래서 체코 프라하나 오스트리아 비인을 방문한 여행자들이 내친 김에 폴란드까지 가보려 해도 바르샤바까지의 여행은 도저히 ‘시간표’가 나오지 않고 그래서 크라카우 정도를 가보는 것 아닌가 합니다. 베를린은 북위 52도 31분 동경 13도 24분 지점에 위치하고 바르샤바는 북위 52도 13분 동경 21도 2분에 위합니다. 그러므로 동서로 나란히 인접한 두 나라의 수도 사이의 거리는 북위(北緯, north latitude)는 필요 없고 동경(東經, east longitude)만 따져보면 됩니다.

 

독일과 폴란드는 오더(Oder) 또는 오데르라고 불리우는 강(江)으로 국경을 삼아 인접하여 있는데 베를린은 이 오더강에서 불과 100km 정도 거리에 있습니다. 그런데 베를린에서 서쪽 직선거리 네덜란드 국경(동경 7도 4분)까지의 거리는 대략 500km 정도입니다. 바르샤바도 베를린 보다 심하지는 않지만 비슷하기는 합니다. 바르샤바에서 폴란드 동쪽 벨라루스(백러시아) 국경(동경 23도 42분 기준)까지는 약 200km인데 비해 서쪽 독일과의 국경 오더강(동경 14도 32분 기준) 까지는 근 500km가 됩니다. 지리학자들과 천문학자들, 또는 수학자들 덕택에 위도(緯度)와 경도(經度)만 알면 직근거리를 계산하는 공식이 이미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독일과 폴란드의 수도 베를린과 바르샤바가 이렇게 국토 한쪽에 쏠려 있는 이유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연합국들이 폴란드와 소비에트(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사이의 국경을 ‘커존 라인(Curzon line)’을 기초로 했기 때문입니다.

 

커존라인의 ‘커존’은 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의 영국 외무장관 조오지 커존(George Curzon, 1859~1925)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1795년 독일(프로이센)과 러시아의 제3차 폴란드 분할로 지도상에서 사라진 폴란드는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다시 제2공화국으로 탄생합니다. 폴란드 제1공화국은 프랑스 혁명 이후 유럽에서 가장 선진적인 헌법을 채택했다가 호헨촐레른 왕가의 프로이센과 로마노프 왕가의 러시아에게 멸국(滅國)의 화(禍)를 당했던 바로 그 폴란드입니다. 123년 만에 다시 나라를 세운 폴란드인들는 피우수트스키(Piłsudski) 장군 주도하에 당시 레닌(Lenin)이 정권을 잡고 있던 소련과 전쟁을 벌려 커존라인(Curzon line) 동쪽 약 200km까지 영토를 넓히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연합국들은 폴란드와 소련의 국경을 다시 커존라인을 기준으로 획정하였고 그에 대한 보상으로 폴란드는 독일쪽으로 오더강까지의 영토를 차지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인 1937년 국경과 비교할 때, 종전 후 폴란드 영토는 동쪽 국경으로부터는 약 200km가 밀려난 반면 서쪽으로는 약 100km를 전진합니다. 이것을 독일쪽 문헌에서는 "국경선의 서쪽 이동(Westverschiebung, west shift)“이라고 지칭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소련사람들이 군인과 민간인을 합쳐 약 2천만명이 넘게 사망했던 것을 상기해보면 이런 방안을 관철한 소련의 스탈린(Joseph Vissarionovich Stalin, 1878~1953)을 심하게 나무랄 일은 아니라고도 생각될 수 있습니다. 커존라인이 폴란드의 동쪽 국경선이 됨으로써 거가에 거주하던 폴란드인 약 250만이 서쪽지방으로 이주를 해야 했습니다.

 

유럽 “국경선의 서쪽 이동”에 의해 폴란드 영토로 된 제2차 세계대전 이전(1937년) 독일영토가 대부분 서(西)프로이센이라고 불리우는 지역입니다. 서프로이센 외에 오더강 동쪽 브란덴부르크 일부도 폴란드 영토가 되었습니다. 오더강 동쪽에는 노이마르크(Neumark)라는 이름으로 프로이센 브란덴부르크에 속하는 지역이 있었습니다. 브란덴부르크 노이마르크 지역은 독일인, 폴란드인, 카슈브인, 유태인 등 여러 민족이 오래전부터 혼재했었던 서프로이센 지역과 달리 오롯한 독일인 지역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더강은, 금강이 충청도를 흐르고 영산강이 전라도를 흐르듯, 프로이센의 브란덴부르크를 가로지르는 하천이었습니다. 그러나 히틀러의 나치독일이 대놓고 ‘Lebensraum'을 내세우며 폴란드를 침공했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일절 그런 사실을 내색하지 아니합니다. 브란덴부르크가 옛 동독 지역이라는 점도 작용했을 성 싶습니다.

 

브란덴부르크에 속했던 노이마르크와 달리 서프로이센은 그 영역을 정확히 한정하기 어렵습니다. 귄터 그라스의 소설 ‘양철북’의 무대가 되었던 단치히(폴란드명 그단스크)가 서프로이센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지만 단치히는 뤼벡이나 함부르크 같은 한자동맹 자치도시의 지위를 누려왔기 때문에, 서울을 경기도 속에 자리매김 하기 어려운 것과 같은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서프로이센 지방은 동서(東西)로는 동(東)프로이센과 포메른(Pomerania, 현재 폴란드 영토인 Farther Pomerania, Hinterpommern와 독일 영토인 Western Pomerania, Vorpommern로 구성됨) 지방 사이이고, 남북(南北)으로는 발트해 연안에서 남쪽으로 약 100km 안팎의 지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폴란드의 프롬보르크(Frombork, 독일명 Frauenburg)에서 토룬(Toruń, 독일명 Thorn)에 이르는 지역입니다.

 

지동설(地動說)을 서유럽 최초로 제시한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가 바로 이 서프로이센의 토룬(Toruń)에서 태어나 프롬보르크(Frombork)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코페르니쿠스는 천문학자라기 보다는 경제학자였고 교회행정가였는데, 열 살 무렵 부모가 세상을 떠난 후 4남매가 외삼촌(Lucas Watzenrode, 1447~1512)에 의해 양육되었고 폴란드 크라카우, 오스트리아 비인, 이탈리아 볼로냐 등 대학에서 공부를 해서 라티어, 독일어, 폴란드어에 두루 능통했다고 합니다. 유럽 지성사에 가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가져온 코페르니쿠스의 논문 “천체의 공전(公轉)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 on the Revolutions of the Heavenly Spheres)”는 1543년에 당시 신성로마제국 자치도시 뉘른베르크(Nürnberg)에서 처음 출판되었습니다.

 

당시 뉘른베르크는 코페르니쿠스 이전 지동설의 맹아를 싹틔웠던 Bernhard Walther(1430~1502)나 Regiomontanus(1436~1476)가 활동했던 도시였으며, 신학(神學) 분야에서 멜란히톤(Philipp Melanchthon; Philipp Schwartzerdt, 1497~1560)과 맞서면서 동(東)프로이센 쾨니히스베르크 교수를 역임했던 오시안더(Andreas Osiander, 1498~1552)가 활동하던 도시였습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이론은 니콜라우스 쇤베르크(Nikolaus Kardinal von Schönberg, 1472~1537) 등 독일(신성로마제국) 학자들에 의해 서유럽 세계에 알려졌고 약 100년 후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와 케플러(Friedrich Johannes Kepler, 1571~1630)에 의해 계승됩니다. 갈릴레이와 달리 자기 이론에 해석이나 설명을 붙이지 않고 수학적인 이론 형태 만으로 발표되었던 코페르니쿠스의 저작물은 그 때문에 지동설이 성서의 내용에 반한다고 본 로마교황청의 제재나 탄압을 받지 않았으며 뒤늦게 19세기에 와서 카톨릭의 금서(禁書)로 지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