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2년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1712~1786),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1717~1780) 그리고 러시아의 에카테리나 여제(1729~1796) 등 유럽의 걸출한 군주 세 사람이 합의하여 해치운 폴란드 제1차 분할은 폴란드가 러시아에 대항하면서 오스만투르크(Ottoman Turkey; Osmanisches Reich)와 손을 잡은 것이 빌미를 제공했고 브란덴부르크와 동프로이센간의 연결공간을 확보하려는 프로이센의 현실적인 필요가 외교적으로 성과를 거둔 결과였습니다. 프로이센은 이렇게 확보한 지역을 서(西)프로이센이라 명명하였습니다. 프랑스혁명(1789~1799)으로 인하여 유럽 각국 왕실이 제1차 대불(大佛)동맹(1792–1797)을 결성하여 프랑스 공화국 혁명군과 대립하고 있는 가운데 폴란드는 프랑스 보다도 더 선진적인 공화국 헌법을 도입했다가 1793년 이웃나라 프로이센과 러시아에 의해 제2차 분할의 변을 당합니다. 남(南)프로이센(Südpreußen)은 폴란드 제2차 분할로 프로이센이 얻은 새로운 영토를 지칭합니다. 1795년 제3차 분할로 폴란드라는 나라가 지도상에서 사라졌을 때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가 프로이센 영토로 추가되었는데 바르샤바가 남프로이센의 행정중심지로 간주되었습니다. 남프로이센 외에 1795년의 제3차 분할로 신(新)동프로이센(Neuostpreußen) 지역도 탄생하는데 이 신동프로이센은 동프로이센의 동부 및 남부에 연접하는 지역입니다.
(그림출처 : nl:Gebruiker:Känsterle, de:Benutzer:Sansculotte, de:Benutzer:kgberger)
그러나 프로이센이 차지했던 남프로이센이나 신동프로이센은 프랑스 나폴레옹과 러시아 알렉산드르 1세 간의 1807년 틸지트화약(Treaties of Tilsit)에 의해 모두 고스란히 내어놓아야 했습니다. 틸지트 화약에 의해 바르샤바 공국(Herzogtum Warschau; Duchy of Warsaw)이 새로 세워지게 되는데 이 나라는 일종의 나폴레옹 프랑스의 위성국가로서 당시 남프로이센 지역 거의 전부를 프로이센으로부터 넘겨받았습니다. 신동프로이센의 경우 남서부 지역(Plozk Department)은 바르샤바 공국에 귀속되고 동북부 지역(Bialystok Department)은 러시아에 귀속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남프로이센이나 신동프로이센은 겨우 10여년 남짓 프로이센의 영토로 있었던 셈입니다. 1815년 빈 회의(Congress of Vienna)에서 프로이센은 종전 남프로이센 영역의 3분의 1 정도에 해당하는 서쪽지역을 다시 차지하게 되는데 이것이 포센지역(Großherzogtum Posen; Province of Posen, 현재의 폴란드 Poznań)이며 1920년 신생 폴란드 제2공화국에 넘겨줄 때까지 프로이센의 영토에 속했습니다.
(그림출처 : sansculotte@despammed.com)
남(南)프로이센과 신(新)동프로이센 지역의 변천
기 간 |
남프로이센 |
신동프로이센 | ||
1795~1807 |
남프로이센 |
신동프로이센 | ||
1807~1815 |
바르샤바공국 |
바+러 | ||
1815~1830 |
포센+폴 |
러시아-폴란드 왕국(Congress Poland) | ||
1830~1916 |
포센+폴 |
러시아령 폴란드(Russian Poland) | ||
1916~1918 |
포센+폴 |
폴란드 왕국(독일/오스트리아 위성국가) | ||
1918~1920 |
포센+폴 |
폴란드 제2공화국 | ||
1920~ |
폴란드 제2공화국 |
(Sklodowski Family: Wladyslaw Skłodowski and his daughters Maria, Bronisława and Helena)
퀴리부인(Marie Skłodowska Curie, 1867~1934)이 바르샤바에서 태어난 1867년부터 폴란드를 직접 통치하던 러시아는 폴란드를 ‘비스튤라 랜드(Vistula Land, Weichselland)’라고 부르면서 폴란드어 사용과 폴란드 역사 교육을 억압하면서 폴란드의 러시아화(Russification)를 본격적으로 추진합니다. 여성에게는 대학입학 허용이 되지 않았던 바르샤바를 떠나 1891년 24세의 나이로 파리에 온 퀴리부인은 11월 소르본느 대학 물리학과에 입학하였는데 그 해 소르본느 대학 재학생 9천명 가운데 여성은 210명에 불과했고 자연과학부 학생 1,825명 가운데 여학생은 23명이었다고 합니다. 또 여학생 대부분이 주로 외국에서 유학을 온 사람들이었는데 그 이유는 프랑스 여학교에서 대입수능시험(Baccalauréat) 필수과목이었던 물리, 생물, 라틴어, 그리스어를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동료 프랑스 출신 학생들에 비해 사전지식이 상대적으로 부족했고 프랑스어도 문제가 되었을 퀴리부인이 짧은 기간에 발군의 실력을 과시한 것이 놀랍기만 합니다. 이런 퀴리부인을 배출한 폴란드는 1813년 10월 라이프치히 전투(Battle of Leipzig)에서 나폴레옹의 프랑스 편에 서서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 스웨덴 등 이웃나라를 상대로 병력 9만명을 투입하여 장렬히 싸웠지만 패배했고 살아 돌아온 병력은 고작 3만명 정도에 그쳤습니다. 살벌한 국제관계에서 합종연횡의 줄을 잘못 선 불운 때문이었는지, 친러파니 자주파니 하며 사회지도층이 분열했었던 폴란드인들의 자업자득이었는지 설왕설래 되고 있지만 나폴레옹의 패배 이후 100년이 넘도록 폴란드는 잃어버린 국권을 되찾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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