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프로이센 해군(海軍)과 고종(高宗)의 외교고문 묄렌도르프

뇌하수체 2010. 7. 12. 20:13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은 내륙에 위치한 영방국가(領邦國家)로서 바다로 나가는 항구를 가지고 있지 못했으나 1618년 브란덴부르크-호헨촐레른 가문이 발트해에 면한 프로이센공국(公國)을 프로이센-호헨촐레른 가문의 알브레히트 2세로부터 상속받으면서 처음으로 보유하게 되었다. 제2대 프로이센공(公)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1553~1618)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한 지기스문트(1572~1619)의 장인으로서 아들 없이 정신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으며 1608년부터 맏사위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가 프로이센공국의 섭정(攝政)을 맡았었다. 당시 프로이센공국은 명목상으로 폴란드왕의 봉토(封土)에 속하였으므로 프로이센 쾨니히스베르크에 인접한 항구 필라우(Pillau)와 메멜(Memel)에서는 폴란드왕을 위해 선박이 건조되기도 했었다.

1656년 스웨덴 해군이 폴란드를 공격하기 위해 프로이센 항구 개방을 요구했을 때 당시 속수무책이었던 대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해군력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네덜란드에 2척의 선박건조를 주문했으나 영국의 방해로 확보하지는 못했다. 1675년 브란덴부르크를 침공한 스웨덴군을 물리친 훼벨린(Fehrbellin) 전투 이후 대선제후는 네덜란드에서 선박을 임대하여 함대를 조직하였고 자체 조선소 건설에 착수하여 1680년에는 28척의 전함(戰艦)를 보유하게 되었다. 같은 해에는 아프리카 가나(Ghana) 지역에 진출하여 일종의 식민 항구도시인 ‘그로스 프리드리히스부르크(Gross Friedrichsburg)’를 건설하기도 했다. 한편, 1680년에는 엘베강을 통해 북해(北海)로 나가는 내륙항구로서 막데부르크(Magdeburg)가 브란덴부르크에 귀속되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발트해로 진출하는 통로를 대부분 스웨덴이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북해 진출로를 확보한 것은 경제적으로 매우 의미있는 일이었다. 1684년 10월 1일에 대선제후의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해군이 공식 출범하였다. 1689년에는 베를린, 북해연안의 엠덴(Emden) 그리고 프로이센의 필라우 등 세 곳에 함대사령부가 설치되었다.

대외무역에서 얻는 이익을 해군 유지의 재원(財源)으로 사용한다는 당초 계획이 1701년 이후 차질을 빚고 보유하는 선박의 손실이 늘어나면서 비용을 감당하지 못한 프리드리히 1세는 1711년 해군함대와 브란덴부르크-아프리카회사를 모두 해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아프리카 가나 지역에 건설했던 항구 그로스 프리드리히스부르크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에 의해 1717년 네덜란드에 매각되었다. 1720년 북방전쟁을 종결짓는 스톡홀름 조약으로 오더강을 통한 발트해 진출통로를 확보한 프로이센은 1733년 해군 재창설 필요성을 다시 검토하였으나 육군건설에 주력하고 해군력은 덴마크나 네덜란드 등 외국과의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지원을 받는 것이 타당하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아들 프리드리히 대제도 같은 생각이었다. 영국이나 스페인 등 이미 강력한 해군을 가진 나라들과 해군력으로 경쟁해서는 이들 나라들을 따라잡기 힘들고 그보다는 오히려 육군을 유럽최강 수준으로 보유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아울러, 해전(海戰)에 의해 전쟁의 승패가 결정되는 것은 극히 드문 경우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이런 생각이 100년 넘게 변함없이 유지되면서 프로이센은 유럽 강대국 중 해군을 가지지 않는 유일한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1848년부터 덴마크와 전쟁을 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최소한의 자체 해군력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하게 된 것이었다. 이리하여 1850년대부터 프로이센의 해군이 적극 육성되기 시작했고 1860년대에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 미국의 뒤를 이어 프로이센이 중국과 통상협정을 체결할 수 있었다. 이런 시대적 배경속에서 1869년 파울 게오르그 폰 묄렌도르프(Paul Georg von Möllendorff, 1847년 브란덴부르크 Zehdenick 출생, 1901년 중국 영파에서 사망)라는 프로이센 청년이 이탈리아 트리에스테를 거쳐 중국 상하이에 도착하게 되는데 이 사람이 바로 1882년 고종의 외교자문관이 된 ‘묄렌도르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