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東)프로이센에 프로이센공국이 세워지기 불과 4년 전인 1521년 서부(西部) 독일 루르(Ruhr) 지역 주변 라인강 유역과 베스트팔렌 지방에 율리히-클레브-베르크 연합공국(Vereinigte Herzogtümer Jülich-Kleve-Berg)이라는 영방국가(領邦國家)가 출범했다. 독일의 라인강 하류 연안과 베스트팔렌 지역은 오늘날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와 국경을 접하는 지역으로서 경제적으로 부유했으며 유럽의 동서(東西)와 남북(南北)이 교차하는 지점이어서 군사전략상으로도 중요한 지역이었다. 그런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이 지역에서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와 프랑스 부르봉 왕가가 첨예하게 대립하며 세력다툼을 했다. 브란덴부르크(Brandenburg)는 신성로마제국 북동(北東) 방면의 변경(邊境)이었고 율리히-클레브-베르크 연합공국은 신성로마제국 서남(西南) 방면의 변경이었다.
율리히-클레브-베르크 연합공국은 서부 독일의 유력 귀족집안이었던 마르크 가문(Von der Mark) 요한(Johann von Jülich-Kleve-Berg, 1490~1539)의 통치시기에 성립하였는데 요한은 1511년 장인(丈人)으로부터 율리히와 베르크 공국을 물려받았고 1521년에는 부친으로부터 클레브 공국을 상속받았다. 연합공국의 수도는 처음 클레브였다가 나중에는 뒤셀도르프(Düsseldorf)로 옮겨졌다. 1517년 마르틴 루터의 95개 테제 발표로 시작되는 종교개혁 시기에 연합공(公) 요한은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하였다. 율리히와 클레브 지역에서는 카톨릭이 우세했고 베르크 지역은 칼뱅파 프로테스탄트의 비중이 높았으며 연합공국 북쪽 베스트팔렌 지역에서는 루터파 프로테스탄트가 우세했다. 다양한 교파(敎派)가 지역별로 상이하게 분포한 것이 연합공국의 상속(相續)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었고 루터파에서 칼뱅파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했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한 지기스문트(Johann Sigismund)는 1609년 남계(男系)후손이 끊긴 연합공국으로부터 1614년 크산텐 협정(Vertrag von Xanten)에 의해 클레브(Kleve)와 베스트팔렌의 마르크(Mark) 및 라펜스베르크(Ravensberg)를 상속받았다.
프로이센공국은 1618년 후손이 끊겨 동일한 호헨촐레른 가문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한 지기스문트가 상속을 받았으나 율리히-클레브-베르크 연합공국은 1609년에 남계(男系) 후손이 단절되고 당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한 지기스문트의 부인 안나(Anna von Preußen, 1576~1625)가 외삼촌 요한 빌헬름 (Johann Wilhelm, 1562–1609)로부터 연합공국의 일부를 분할상속받은 것이었다. 연합공(公) 요한의 아들 빌헬름(1516~1592)은 신성로마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1세(1503~1564)의 딸인 합스부르크 가문 마리아(Maria von Habsburg, 1531~1581)와 혼인하여 2남 5녀를 두었으나 큰아들 카알 프리드리히(1555~1575)가 로마여행 중 천연두에 걸려 20세의 나이에 갑자기 사망하였고 둘째아들 요한 빌헬름(Johann Wilhelm, 1562~1609)은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정신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요한 빌헬름이 후손이 없이 사망할 것이 확실시 되면서 네 명의 누이 가운데 장녀 마리 엘레노어(Marie Eleonore, 1550–1608)와 차녀인 안나(Anna, 1552–1632) 시댁(媤宅) 가문이 각각 상속권을 주장하고 나섰다. 장녀 마리 엘레노어는 제2대 프로이센공(公)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의 부인이었고 차녀 안나는 노이부르크-팔츠백(伯)의 부인이었다.
마리 엘레노어의 장녀가 바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한 지기스문트의 부인 안나(Anna von Preußen)이다. 1609년부터 장녀 마리 엘레노어의 사위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한 지기스문트와 차녀 안나의 아들인 노이부르크-팔츠백 볼프강 빌헬름(Wolfgang Wilhelm von Pfalz-Neuburg, 1578~1653)간의 상속권 분쟁이 시작되어 1614년 크산텐 협정에 의해 율리히-클레브-베르크 연합공국을 양측이 분할하여 상속하는 것으로 일단 타결이 되었다. 30년전쟁(1618~1648)시 라인강 하류지역은 상대적으로 작은 피해를 입었다. 30년전쟁이 끝나갈 무렵 라인강과 베스트팔렌 지역의 중요성을 인식한 브란덴부르크 대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상속권 분쟁의 일환으로 1651년 베르크(Berg)를 공격하기도 하였으나 신성로마제국이 적극적으로 중재에 나서면서 1666년 약 60년 동안 계속된 상속권 분쟁이 최종적으로 타결되었다. ‘프로이센’의 라틴어식 표현인 ‘보루시아(Borussia)’가 서부독일에서 회자(膾炙)되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었다. 이영표 선수가 뛰었던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바로 그 ‘보루시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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