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7년전쟁(1756~1763) 전야(前夜)와 마리아 테레지아 (by Franz Kugler)

뇌하수체 2010. 7. 22. 01:00

프리드리히 2세의 슐레지엔 침공으로 시작된 제1차 슐레지엔 전쟁(1740~1742)이 영국의 중재로 베를린조약(1742.7.28)에 의해 종결되고 역시 프리드리히 2세의 보헤미아 지방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제2차 슐레지엔전쟁(1744~1745)이 드레스덴조약(1745.12.25)에 의해 종결된 후 아헨조약(1748.10.18)으로 오스트리아왕위계승전쟁(1740~1748)이 드디어 끝이 났을 때 유럽대륙은 다시 평온을 되찾은 듯 보였다. 그러나 그 평온은 찌는 듯이 무더운 여름날 폭풍 전야의 정적(靜寂)같은 것이었다. 뿌연 안개가 지평선을 자욱이 메우고 있었고 여기저기에서 짙은 구름이 만들어져 창공으로 날아올랐으며 천둥소리가 나직이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구름과 구름들이 서로 합쳐지면서 커다란 먹구름이 형성되었고 예상했던 것 보다 훨씬 큰 폭풍우를 몰고 온 것이었다.

 

유럽에 폭풍우를 몰고 온 이런 먹구름 정세(情勢)가 형성된 것은 무엇보다 신흥국(新興國) 프로이센의 기세(氣勢)를 꺾어놓기 위해 기존의 강대국들이 공동전선(共同戰線)을 형성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유럽국가들은 프리드리히 2세가 그의 조부나 부친과 달리 명실상부(名實相符)하게 왕(King)의 지위를 대외적으로 관철시키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의 조부 프리드리히 1세나 부친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왕위(王位)는 인접국가들에게 전혀 위해(危害)가 되지 않는 것으로서 단순히 의전적(儀典的)인 것이라고 생각해왔었다. 그래서 유럽의 군주들은 ‘프로이센 왕(王)’이라는 호칭 대신 ‘브란덴부르크 변경백(邊境伯)’이라고 의식적으로 낮추어 부르면서 고작 ‘브란덴부르크 변경백(邊境伯)’에 지나지 않는 프리드리히 2세가 유럽정세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기존 강대국들간의 역학관계(力學關係)까지 변모시킨 것을 괘씸하게 생각했다. 게다가 유럽의 군주들 판단으로 프리드리히 2세는 한번 얻은 전리품에 만족하는 성격이 결코 아니며 프로이센의 영토를 확대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인접국들을 압박하고 국제 외교관계 또한 유리하게 조성하려고 시도할 것이라고 예상되었다. 여기에 왕실간의 개인적인 감정이 겹쳐지면서 프로이센에 대한 견제와 우려의 심리는 노골적인 증오심으로 표출되기도 했다.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는 슐레지엔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슐레지엔이 프로이센에 복속(服屬)된 후에 경제적으로 뚜렷이 발전하는 모습을 보였으므로 마리아 테레지아의 상실감(喪失感)은 더욱 컸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슐레지엔을 프로이센에게 넘겨준 것이 대외관계상 부득이한 것이었으나 단지 협상방법(協商方法)의 일환이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언제고 적절한 시기가 되면 되찾아 올 수 있다고 믿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막연히 생각만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여장부(女丈夫)의 리더십을 발휘하여 국력(國力)을 증강시켰고 외교(外交)에 적극 힘써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국가재정은 짧은 기간내에 부친 카알 6세 치하 수준을 회복하였다. 행정과 교육 개혁을 직접 관장하고 군사훈련도 크게 강화하였다. 특히 당시 오스트리아 재상(宰相) 카우니츠(Wenzel Anton Graf Kaunitz, 1711~1794)는 마리아 테레지아가 프로이센 프리드리히 2세에 대해 가지고 있는 깊은 증오심에 공감하였고 슐레지엔을 되찾아오기 위한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서 다른나라와 동맹관계를 체결하는 분야에서 탁월한 수완을 발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