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와 프랑스의 마리 앙트와네트

뇌하수체 2010. 7. 24. 19:03

프리드리히 대왕이 타계하고(1786) 그의 조카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1744~1797)가 왕위를 이어받았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1733년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너(1715~1797)와 결혼하였으나 두 사람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동생 아우구스트 빌헬름(1722~1758)의 아들이었다. 프리드리히 대왕과 아우구스트 빌헬름 형제는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너와 루이저 아말리에(1722~1780) 자매와 각각 혼인(Doppelhochzeit, double-wedding)을 하였으므로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친(親)조카일 뿐 아니라 처(妻)조카가 되기도 했다. 이런 중첩혼(重疊婚)은 당시 유럽왕실에서 그다지 이례적(異例的)인 일이 아니었다.

 

42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육중한 체구를 가져서 'the thick(der Dicke)'이라는 별칭으로 불렸고 프로이센 왕들 가운데 유일하게 첩실(妾室)을 거느렸다. 21세인 1765년 프리드리히 대왕의 질녀(姪女)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너 울리케(1746~1840)와 혼인하였다가 딸을 하나 낳고 이혼한 후 1769년 프리데리케 루이서(1751~1805)와 재혼하여 7남매를 두었고 평생의 반려자였던 첩(妾) 빌헬르미너 리히테나우(1753~1820)와 사이에서 딸을 셋 낳았다. 1786년에는 22살이나 차이가 나는 율리에 폰 포스(1766~1789)와 혼인하여 아들을 하나 두었고 1790년에도 소피 율리아너 프레데리케(1768~1838)와 혼인하여 딸을 하나 두었다. 음악을 좋아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직접 첼로를 연주하였고 모차르트와 베토벤을 베를린에 초청하여 연주회를 열었으며 건축에도 관심을 보야 브란덴부르크문(門)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재위기간 중 선왕인 프리드리히 대왕으로부터 상속받은 재산 5천만 탈러를 탕진하는데 그치지 않고 아들에게 5천만 탈러의 빚까지 물려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러시아 에카테리나 대제와 더불어 폴란드 분할(제2차 1793년, 제3차 1795년)을 성사시켜 프로이센의 영토를 크게 늘려놓았다.

 

1792년 8월 프랑스 루이 16세가 과격파 혁명세력(Jacobin)에 의해 폐위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후 프랑스왕실을 지원하기 위해 프로이센군대가 프랑스 국경을 넘어 진격했다. 루이 16세의 부인 마리 앙트와네트(Marie Antoinette, 1755~1793)는 오스트리아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딸이었으며 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트 2세의 친동생이기도 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혼인 전 이름은 마리아 안토니아(Maria Antonia Josepha Johanna)였으며 1770년 14세의 나이로 루이 16세와 혼인하면서 프랑스식 이름으로 바꿨다. 오스트리아 군대가 아니고 프로이센 군대가 프랑스로 진격했던 것은 1년 전 드레스덴(Dresden) 부근 필니츠(Pillnitz)에서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와 오스트리아 레오폴트 2세 사이에 합의된 필니츠선언(Pillnitzer Deklaration, 1791.8.27)에 의거한 것이었다. 필니츠 선언에 의하여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바이에른 상속권 분쟁(Bayerischen Erbfolgekrieg, 1778) 이후의 대립관계를 청산하고 프랑스문제와 폴란드문제에 대해 상호협력하기로 했다. 프랑스 혁명정부는 필니츠선언을 선전포고로 간주했다.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의 요구를 받아들여 당시 프로이센의 동맹국이었던 오스만 투르크에 대한 공격을 중단하기로 하였다. 오스만 투르크에 대한 러시아의 공격은 계속 되고 있었다.

 

제1차 대불(對佛)동맹군(1792~1797)으로 프랑스에 출정(出征)하는 프로이센 군대의 총사령관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가 아니라 프리드리히 대왕 시절 활약했던 참모(Herzog Karl Wilhelm Ferdinand von Braunschweig)가 임명되었다. 프로이센에서는 통상 왕이 직접 총사령관을 맡았었다. 관례에 따라 왕도 군대와 함께 원정길에 올랐으나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과거 프로이센 군주들과 달리 후궁이나 궁정시녀들까지 모두 데리고 갔다. 군인들도 장교, 하사관, 일반사병 등 세 그룹으로 나누어 젊은 여성들로 구성된 간호(看護)부대의 치료를 받도록 했다. 왕실의 재정난(財政難)으로 군수물자의 보급이 원활하지 않았고 야전 급식시설이나 탄약 수송설비가 부족했다. 그에 비해 군부대 주변의 집창촌(集娼村)은 오히려 넘쳐났다. 프로이센 군대가 손쉽게 승리를 거둘 것이라는 예상은 크게 빗나갔다. 제대로된 군복 조차 갖추지 못한 프랑스군이 전투력에서 우위를 보인 것이었다. 자발적으로 참전한 병사들의 비중이 높은 프랑스군에 비해 프로이센군은 대부분 비싼 급료를 주고 모집한 용병(傭兵)들이었다. 적군을 향해 대오(隊伍)를 지어 돌격하는 전술에 익숙했던 프로이센군에 대해 프랑스군은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은폐(隱蔽)와 엄폐(掩蔽)를 하고 앉아서 사격하거나 엎드려 사격하는 등 기동력있는 전술을 구사했다. 개인화기 등 군장비의 성능도 양측간에 차이가 없었다. 프로이센군 3만5천명과 프랑스군 4만7천명이 포격전(砲擊戰)으로 맞붙은 1792년 9월 20일의 발미전투(Battle of Valmy)를 분기점으로 프랑스군이 승기를 잡았고 이 원정에서 프로이센은 통틀어 2만명 이상의 병력을 잃었다.

 

프랑스 혁명군과 전쟁한 대가를 폴란드에게서 보상받을 수 있었던 것이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에게는 행운이었다. 프랑스 혁명에 고무된 폴란드에서는 1791년 유럽 최초로 권력분립을 명문화한 선진적(先進的)인 헌법(5월 3일 헌법)을 마련하고 러시아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려 하였으나 러시아의 에카테리나 대제는 이것을 오히려 폴란드 공격의 구실로 삼으면서 러시아와 폴란드간에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당시 프로이센은 폴란드와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고 있었으나 전쟁에 가담하지 않았다. 프로이센은 프랑스 혁명군의 위협에 맞서 유럽의 평화를 지키는 대가로 폴란드 영토 일부를 할양할 것을 러시아에 요구했으며 러시아가 이에 응하지 않을 경우 대불(對佛) 동맹에서 탈퇴하겠다고 했다. 에카테리나 대제는 프로이센의 요구가 무리한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고심 끝에 이를 수락하기로 했다. 남부에서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터였으므로 프로이센을 프랑스와의 전쟁에 묶어둘 수 있다면 폴란드 영토 일부를 할양해주어도 무방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1793년 1월 23일 체결된 프로이센과 러시아의 합의(제2차 폴란드 분할)에 의해 프로이센은 동(東)프로이센과 서(西)프로이센을 연결하는 지역에 위치한 단치히(Danzig)와 톤(Thorn)을 차지했고 새로 영득한 폴란드 남부 지역을 남(南)프로이센으로 구획했다. 러시아는 벨로루시 전 지역과 리투아니아와 우크라이나 지역 상당부분을 차지했다. 오스트리아는 제2차 폴란드분할에 참여하지 못했다. 프로이센과 러시아가 두 번째로 폴란드 분할을 합의된 날 바로 이틀 전(1793.1.21) 루이 16세가 단두대(Guillotine)에서 처형되었고 그로부터 9개월 후인 1793년 10월 16일 12시 파리의 콩코드 광장에서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단두대 형(刑)이 집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