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철학자 프리드리히대왕(大王)의 슐레지엔 침공 (by Franz Kugler)

뇌하수체 2010. 7. 20. 02:17

 군인왕(軍人王)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타계하고(1740.5.31)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2세(1712~1786)가 제위에 오른 지 5개월이 지난 그 해 가을, 베를린 궁정은 훨씬 자유로워진 분위기에서 저마다 즐거움을 누리고 있었다. 당대 유럽의 대표 지성 프랑스인 볼테르(Voltaire, 1694~1778)가 프리드리히 2세의 초청으로 베를린에 왔고, 내로라하는 유럽의 지식인들이 프리드리히 2세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프리드리히 2세의 누나 바이로이트의 빌헬르미너(Wilhelmine von Preußen, 1709–1758)와 여동생 안스바흐의 프리데리케(Friederike Luise von Ansbach, 1714~1784)도 방문했었다. 학술 세미나, 콘서트, 축제 등이 끝없이 이어질 것으로만 보였다.

 

 

 바로 그 때 급보(急報) 하나가 베를린에 전해졌다. 오스트리아 빈(Wien)의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알 6세가 10월 20일 임종했다는 것이었다. 당시 프리드리히 2세는 왕세자 시절에 기거했던 라인스베르크(Rheinsberg)에서 요양차 머무르고 있었다. 반복되는 열병(熱病)에 시달리던 참이었다. 카알 6세가 사망했다는 소식에 프라드리히 2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오랫동안 마음 속에 담고 있었던 것을 실현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볼테르에게 쓴 편지에서 프리드리히 2세는 “이제 때가 왔습니다.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역학관계(力學關係)를 이제 바꾸어 놓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라고 썼다.

 

 

 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제 자리를 독점하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는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으로 국력이 소진해질 대로 소진해진 상태였다. 오랫동안 오스트리아군(軍)을 이끌었던 오이겐(Eugen von Savoyen, 1663~1736) 왕자도 그에 필적할만한 후임자가 없이 사망하였고 오스트리아 대공 겸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알 6세는 그의 딸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1717~1780)에게 왕위를 계승시키는 것에만 집착하였다. 오이겐 왕자는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왕위를 계승하는 것은 18만명의 오스트리아 군대의 힘으로 관철이 가능한 것이지 허황된 외교적 수사(修辭)로 될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지만 누구도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그 시기 신흥국가 프로이센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많은 군비(軍費)를 쓰면서도 정작 전쟁에 개입하는 일이 없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를 비웃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으나 당시 프로이센 군대의 훈련 수준은 유럽 일류(一流) 수준이었다. 국가부채는 없었으며 왕실은 현금으로만 9백만 탈러를 보유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는 백여년 전부터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에게 이중플레이를 일삼는 고약한 존재였다. 서부 독일 라인강 유역의 율리히(Jülich)와 베르크(Berg) 지역을 차지할 수 있도록 지지하겠다고 약속해놓고는 곧바로 다른 경쟁국가에게도 같은 약속을 해주곤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아마도 오스트리아의 오랜 책략을 격파해야 할 시기가 바로 지금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 수반될 위험을 동시에 보았었다. 베를린에서 멀리 떨어진 라인강 연안에서 총력전을 벌여 전쟁을 수행하기에는 얻을 것에 비해 국력(國力)의 손실이 너무 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라인강 유역이 아니고 베를린에서 가까운 중유럽의 요충지(要衝地) 슐레지엔(Schlesien)에서 승부를 보는 것은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