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일본총리 아베신조(安倍晋三)와 프로이센총리 비스마르크(Bismarck)

뇌하수체 2013. 5. 12. 02:24

「동아시아 속의 한일 2천년사(요시노 마코토 저, 한철호 역, 도서출판 책과함께, 2005.2)」라는 책을 흥미롭게 읽고 있는 도중 일본의 아베 총리와 프로이센 비스마르크 총리가 자꾸 떠오릅니다. 동해(東海)에 면한 야마구치(山口)현 출신 아베신조(1954~)가 외무장관을 지낸 부친 아베신타로에게서 프로이센총리 비스마르크의 외교를 배웠을 것을 기대하기는 난망한 노릇이지만, 미국 캘리포니아 유학생 출신이니만큼 미국의 생각을 읽어내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을 것으로 짐작은 할 수 있겠습니다.

 

 

 

세 편의 신문기사를 가져와 읽으면서 최근의 동아시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 1. 장은수 황금가지 편집이사 「동아시아 속의 한일 2천년사」 서평(문화일보 2005.3.18)

 

 

돌아보며 현재의 거울로 되지 않는 게 어찌 역사일 수 있으랴. 요시노 마코토 교수의 「동아시아 속의 한일 2천년사」를 읽으면서 내내 이런 생각을 했다. 그 사이에 독도의 날 제정이라는 시마네현의 무분별한 도발로 동해 바닷물이 거세졌고, 일본 후쇼사판 역사 교과서의 검인정 문제로 현해탄의 물결이 한껏 높아졌다. 화해와 협력을 통하여 새 역사를 만들어 가야 할 양국 관계가 다시 미궁에 빠져든 느낌이다. 한·일 양국 국민들이 켜켜이 쌓아 올린 반감을 누그러뜨리고, 서로를 존경하면서 교린하려면 또 얼마나 많은 땀이 필요할 것인가. 정말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 책은 고대 원시 사회에서 해방 직후까지 2000년간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지리적으로 이웃한 한·일 두 나라가 함께 만들어 온 역사의 면면들을 시간 순으로 다루고 있다. 한국사라는 틀을 통해서만 일본사를 들여다보았던 나로서는 아주 신기한 경험이었다. 너무나 당연하겠지만 일본은 일본 나름의 역사적 기억이 있다는 점, 그 기억에 저장되어 나타난 한국사는 한국인들의 역사적 기억과는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아는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을 가치는 충분하다.

 

 

이십여 년 이상 한국사를 연구해 온 일급 사학자가 쓴 이 책은 주로 한국에 대한 일본인의 잘못된 역사적 기억을 바로잡고, 지난 오백 년 동안 두 번이나 엄청난 침략 행위를 저지른 일본인의 심성이 어디에서 기원했는가를 다루고 있다. 하늘의 소명을 받은 천황(天皇)이 있는 일본이 본래 중심이고, 한반도에 있는 국가들은 번국(蕃國)이므로 언제라도 일본에 복속해야 한다는 자기들만의 논리가 생겨난 것은 ‘일본서기’를 쓰고 그에 걸맞게 임나일본부를 창조해 냈던 8세기쯤이며, 한국과 일본을 대등한 관계가 아니라 중심과 주변의 관계로 보는 비뚤어진 인식 틀이 일본 사회의 밑바닥에 흐르고 있어서 이웃에 대한 침략을 침략으로 바로 보지 못하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이 책을 읽음으로써 나는 해방 이후 한국의 민족주의 사관이 만들어 낸 일본에 대한 한국인의 잘못된 기억도 대단히 많았음을 반성하게 되었다. 일본의 고대가 야만적 풍습과 왜구로 상징되는 무법천지의 해적 국가가 아니라 한국과 마찬가지로 중화 문명권의 일부로서 고도의 문화를 누린 문명국이었으며 그 기반 위에서 한·일 양국이 교류하고 경쟁하며 전쟁하고 화해해 왔던 것이다. 천 년 이상 글자 한 자, 표현 한 줄을 놓고 거세게 맞부딪쳐 온 양국의 외교 문서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수렁과 진창으로 빠져든 최근의 한·일 관계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동아시아라는 광활한 무대에서 시간을 공유하면서 나란히 발전해 온 양국의 교류사를 찬찬히 다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럴 때 이 책은 하나의 중요한 지침서가 될 것이다.

 

 

 

 

# 2. 마이클 그린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선임 부소장(중앙일보, 2013.5.11, [중앙시평] 동북아 평화협력 구상, 모호하다)

 

 

박근혜 대통령의 이번 워싱턴 방문은 단 하나를 제외하면 대성공이다. 그 하나란 박 대통령이 제시한 동북아 평화구상이다. 모호하고 불완전하다는 인상을 준다. 박 대통령은 미 의회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국과 여타 동북아 파트너들이 참여하는 다자간 대화 프로세스, 즉 동북아 평화 협력 구상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그 출발점은 환경 이슈, 재난 구조, 원자력 안전, 테러 방지 등의 연성 이슈에서부터 대화와 협력으로 신뢰를 쌓는 것입니다. 이 같은 신뢰는 상호 협력의 지평을 넓혀줄 것이며 이 구상은 동북아의 평화와 발전에 기여할 것입니다.” 그다음에 핵심 문장이 등장한다: “물론 여기에는 북한도 참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동북아 평화포럼이란 구상 자체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미 1990년대에 한국과 일본 정부가 여러 차례 별도로 제안한 바 있고 2005년 9월 발표된 6자 공동성명의 일부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제안을 새로 포장해 북한이 전례 없는 도발을 저지른 뒤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에 발표하는 것은 문제다. 다음과 같은 비판적 질문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첫째, 평양은 2005년 9월의 비핵화 합의를 준수하지 않을 것이다. 이 경우 해당 포럼은 핵무기를 지닌 북한과 “평화 공존” 하기 위한 틀처럼 비치지 않을까? 물론 박 대통령의 제안에는 평화 협정에 대한 논의가 포함돼 있지 않으며 이는 중요한 사항이다. 북한이 추진 중인 핵무기 프로그램을 정당화해줄 잠재적 가능성을 낮춰주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설사 그것이 다자간 논의라 할지라도 한 나라의 국경을 넘는 안보 이슈를 논의하는 것에는 위험이 따른다. 다른 당사자들이 비핵화 정책을 포기하고 평양과 예전과 다름없는 관계를 유지할 준비가 돼 있다는 뜻으로 해석될 위험 말이다. 물론 북한이 포럼에 참가하려면 반드시 핵 포기 약속이 전제돼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면 이 같은 위험은 없어진다. 하지만 박 대통령의 제안에선 이 같은 조건이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았다.

 

 

둘째, 만일 이것이 점진적 프로세스라면, 다시 말해 북한이 2005년 9월 합의를 준수하지 않는 탓에 처음에는 배제되는 그런 프로세스라면 서울은 어떻게 중국이 여기에 참여하도록 설득할 것인가? 조지 W 부시와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그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중국을 설득해 다음 두 가지 중 하나를 실행하려고 노력했다. 하나는 평양이 협력을 거부할 때 북한 없이 6자회담을 재개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6자회담의 바깥에서 에너지와 기타 국제 안보이슈를 논의할 별도의 5자 프로세스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한국과 일본은 물론, 가끔은 러시아도 이런 제안들에 동의했다. 하지만 베이징은 이 주제에 관한 한 그것이 어떤 종류의 변형된 형태가 됐건 간에 확고하게 반대 입장을 나타냈다. 북한을 노골적으로 따돌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번에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이런 제안에 찬성할 가능성도 있지만 이것은 지켜봐야 할 문제다.

 

 

 

이것은 또한 셋째 질문으로 이어진다. 서울 프로세스가 정말로 달성하려는 목표는 무엇인가? 뭔가 다른 것을 노리는 위장책은 아닌가? 실제 목적은 북한과 어울리는 것을 가려주는 위장막을 제공하는 데 있는 것은 아닌가? 한반도의 미래에 관해 서울과 논의하도록 베이징을 끌어들이는 데 목적이 있는가? 또는 북한의 개성공단 폐쇄 조치에 따라 서울이 주도권을 잃지 않았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한 정치적 제스처인가? 이들 질문에 어떤 답변이 나오는가에 따라 이번 제안의 생명력이 결정된다.

 

 

동북아 평화 포럼을 찬성하는 사람들은 유럽연합(EU)이 60년 전 프랑스와 독일이 석탄과 철강 분야에서 협력하기로 한 작은 조치들로부터 시작됐다는 점을 지적한다. 동북아에서 이와 비견할 만한 노력은 어떤 모습을 띨 것인가? 영토 분쟁이 있는 모든 섬과 관련한 공동 어업협정이 알맞을까? 아니면 에너지 협력체제일까? 서울 프로세스는 좀 더 쉬운 문제를 해결한 뒤 이런 방향으로 진화해갈 가능성이 있다. 박 대통령이 미 의회 연설에서 지적했듯 “우리의 구상이 겹치는 곳에서부터 출발한다면 나중에 보다 큰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공통의 기반을 찾는 일이 쉬워질 것이다. 서로 이익이 되는 해법을 찾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이것은 의미가 통하는 주장이다. 그럼에도 이 개념이 힘있는 정책 실행자들의 관심을 끌려면 지금보다 훨씬 더 깊은 생각이 있어야 한다. 이들 정책 결정자는 박 대통령이 말했듯 협력과 경쟁이라는 ‘아시아 패러독스’에 갇혀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 3. 임춘웅 논설위원(내일신문, 2013.4.24, 빅터 차와 마이클 그린Ⅱ)

 

 

"저널리즘에는 국적이 없지만 저널리스트는 국적이 있다"는 말이 있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글을 쓰는 사람 대부분은 자기나라 입장에서 글을 쓰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긴 해도 논지가 지나치게 상식에서 벗어나 있거나 상대를 설득할 합리성이 떨어지면 글의 격이 낮아지고 목표했던 설득에 결국 실패하게 된다.

 

미국에서 한반도 문제를 다루는 학계, 언론계 인사가 어디 하나둘일까마는 빅터 차와 마이클 그린은 특별히 한국에 많이 알려져 있는 인물들이다. 빅터 차는 또한 한국계 미국인이다.

 

 

두 사람 모두 백악관 안전보장회의(NSC)에서 아시아 담당 선임보좌관을 지낸 인물들인 데다 지금도 대학, 미전략문제연구소에서 동북아 문제를 다루는 사람들로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결정에 크고 작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때문에 한국쪽에서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인사들이다. 특히 두 사람은 한국신문에 고정적으로 글을 쓰고 있다. 그러니까 자기 글을 한국정부 당국자들이나 한국의 일반 독자들이 읽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글을 보면 미국의 입장에서 글을 쓰는 것은 이해할 수 있으나 때로는 지나치게 오만하고 때로는 방자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어 유감이다. 필자는 작년 7월 26일자 본란에 '빅터 차와 마이클 그린'이란 칼럼을 써 그런 점들을 지적하고 좀 더 신중하게 글을 썼으면 하는 소회를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이후에도 달라진 게 없다.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 한국인의 자존심 따위를 배려하는 구석이라고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다시 '빅터 차와 마이클 그린Ⅱ'를 쓰는 이유다.

 

 

빅터 차는 지난 17일자 한 신문에 쓴 칼럼에서 "미국은 김정은과 인도방식의 민수용 원자력 거래(글의 앞부분에서 인도방식을 잠깐 설명했다)를 결코 하지 않을 것이며, 인권이 실질적으로 향상되지 않은 상황에서 평양의 살인자들에게 체제보장을 약속할 미국 대통령도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뜬금없이 "이는 (북핵문제의)해결책을 찾을 책임이 한국에 있다는 뜻"이라고 했다. "미국의 정책이 '전략적 인내'이기 때문에 공은 한국에 넘어가 있으며 해결에 앞장설 책임도 한국에 있다"고 강조하고 미국은 다음달 워싱턴에 오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그의 계획을 들으려 할 것이라고 썼다. 언제부터 미국이 북핵 문제를 한국이 간여하도록 했다고 이제 와서 해결의 책임이 한국에 있다고 말하는 것인가. 북한과 핵문제 거래는 결코 안할 것이고 체제보장도 못하겠다면서 무엇으로 한국이 북핵문제를 책임지라는 것일까. 하긴 한국이 간여한 일이 있긴 있다. 북한에 경수로 발전소를 지어주기로 북미간에 2004년 '제네바합의'를 한 뒤 건설비용 70%를 한국이 부담하도록 일방적으로 결정해 한국은 울며겨자먹기로 공사비를 냈다. 그러더니 2003년에는 공사를 그나마 일방적으로 중단시켜 버렸다. 한국측은 그때 공사중단을 반대했다.

 

 

마이클 그린은 20일자 '한·미가 북핵위협에 확실히 대처하려면'이란 칼럼에서 북한의 핵이 한국 일본 괌에 있는 목표를 동시에 타격하도록 설계돼 있기 때문에 이런때 한국이 미국의 글로벌 미사일 방어체계(MD) 밖에 머물러 있는 것은 타당치 않다면서 한국이 들어오면 방어망 효율성도 높이고 평양에는 한미결속을 과시하는 효과도 생긴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같은 신호는 솔직히 말해 베이징을 겨냥한 것이기도 하다"고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 한국이 무엇 때문에 미국의 대 중국 MD체계에 끼어야 하는 것일까. 한국은 지난 20여년 동안 미국의 끈질긴 압력에도 불구하고 미국 MD체계편입을 기피해 왔다. 처음에는 기술적으로 효과가 의심스러웠고 최근에는 중국의 부상과 함께 미국의 대 중국봉쇄 정책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힘겨운 싸움을 계속해 왔다. 그런데 이번 북핵문제가 불거지면서 미국은 이 기회를 활용하려 한다.

 

 

그들의 글 어디에도 한국의 입장은 고려되지 않는다. 마이클 그린은 "대화는 모색돼야 하는 것이지만 지금의 안보문제가 대화를 통해 풀릴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고 쉽게 결론을 내린다. 대화를 통해 무엇이 되리란 기대는 버리고 한미가 군사적 우위를 확보하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다는 취지다. 그들이 미국의 지식인들이고 전직 고위 외교관들이란 점에서 더욱 황당한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지난해 쓴 '빅터 차와 마이클 그린'은 미국인들의 이런 오만을 혹시 한국사람들이 키워준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일이라고 끝맺었다.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소재 독립문(사진출처 : ko.wiki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