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란츠크네히트(Landsknecht)와 미야지마 히로시(宮嶋博史) 교수의 「한국사 공부」

뇌하수체 2013. 9. 8. 02:46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에 재직 중인 미야지마 히로시 교수가 쓴 책 『나의 한국사 공부(2013.1, 너머북스)』는 아무 생각없이 입 속에 넣었다가 쉬이 뱉어내지도 못하고 오랫동안 입안에서 굴리도록 강요하는 값비싼 왕사탕같은 괴로움을 줍니다. 이 책을 들고 아침변기에 앉으면 배변이 순조로워지는 즐거움 또한 물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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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지마 히로시 교수(사진출처 : 한국일보)

 

 

한국학자 유홍준 선생이 남도답사를 떠나고 이덕일 선생이 노론벽파를 준열히 나무라던 시기에 일본학자 미야지마 히로시 교수는 이 책의 부제처럼 ‘한국사의 새로운 이해를 찾아서’ 다른 길을 갔던 가 봅니다. “이영훈(李榮薰)이란 사람의 박사논문” 「조선후기 토지소유의 기본구조와 농민경영」의 내용에 미야지마 교수는 “또 다른 충격”을 받았다고는 합니다(책 p.22).

 

 

조선시대 신분제와 관련하여 미야지마 교수는 “송대 이후 중국은 이미 신분제국가 또는 신분제사회가 아니었다”는 미즈바야시 다케시의 주장을 소개하면서(책 pp.132~133), "명대부터 직업과 신분의 결합이 해체되었고 신분은 양(良)과 천(賤)이라는 두가지로 단순화되었을 뿐 아니라 천민신분은 기본적으로 범죄자에게 한정되어 그 숫자 또한 미미할 뿐이었다“(책 pp.136~137)고 합니다. 그런데 조선의 노비는 16세기에 사회구성원 전체의 30~50%를 차지했다고 미야지마 교수는 생각하고 있습니다(책 p.353).

 

 

유럽에서 상비군제도가 확립되기 이전 16세기 전투병의 주력을 이루었던 용병집단 란츠크네히트(Landsknecht)를 떠올리면, 16세기 임진왜란을 당한 조선의 노비인구가 무려 전체 인구의 30~50%였을 때 당시 왜군과 맞써 싸울 의지와 역량을 가진 백성이 과연 얼마나 되었다는 것인지, 선조가 한양도성을 비우고 몽진한 후 왕궁에 불을 지른 자들이 누구였는지를 상상해보면, “조선은 노예제 국가였다”는 주장을 마냥 나무라기만 할 수도 없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