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식 선생이 쓴 「風水의 한국사(2010.4, 도서출판 타오름)」는 좌향론(坐向論)을 설명하면서 실학자 성호(聖號) 이익(李瀷)의 비판적인 견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술서에는 풍수 좌향의 의의를 밝히지 아니하였고 내가 술사들에게 물어보았으나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고 성호가 적었다는 것입니다(책 p.40). 그런 성호의 생각을 받아들여 저자 이은식 선생은 “마음으로 기를 살펴 동기同氣가 감응할 수 있는 곳을 향하여 그 뒤편으로 좌坐를 삼고, 그 앞으로 향向을 삼으면 될 일이다”라고 권합니다.
백제 고찰 가야사를 불사르고 그 자리에 부친 남연군의 묘를 면례(緬禮)한 흥선대원군의 말로가 그렇게 되었음이 천년 가야사를 허물고 빼앗은 죗값을 치른 것처럼 보여진다고 보는 대목도 흥미롭습니다만(책 pp.296~306), 종교인 듯 미신인 듯 묘한 형이상학(形而上學)으로서 그 양상을 달리하며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풍수지리의 한국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은 아마도 세종대왕의 묘 영릉 이장(책 pp. 101~137)이 아닐까 합니다.
세종은 “내가 죽거든 선왕의 묘택 아래 묻어다오. 그래야 혼백이나마 아버지 어머니께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드릴게 아니냐?”고 유언했을 정도로 효성이 지극했던 왕이라 합니다(책 pp.102~103). 세종은 왕비 소헌왕후 소생 8남 2녀, 신빈(愼嬪) 김씨 소생 6남, 혜빈(惠嬪) 양씨 소생 3남, 숙원(淑媛) 이씨 소생 1녀, 상침(尙寢) 송씨 소생 1녀, 마지막으로 궁인(宮人) 강씨 소생 1년 등 도합 22명의 아들과 딸을 두었는데 세조의 왕위 찬탈을 전후하여 대부분 희생되었다고 합니다(책 p.104). 그래서 세조를 이은 예종 때 태종이 묻힌 헌릉(서울시 강남구 내곡동) 아래에 있던 세종의 능을 현재의 자리(경기도 여주군 능서면)로 이장하였다고 합니다.
음택풍수를 중시했던 유교사회 조선과 달리, 기독교사회 프로이센에는 마을공동체가 함께하는 묘지(Friedhof; cemetery), 교회나 성당, 교회나 성당 지하의 지하묘실(Gruft; Crypt), 신묘(神廟, Mausoleum)이 있었는데 대부분의 프로이센 왕과 왕비가 영면하는 곳은 베를린 돔 지하 묘실(Gruft; Crypt)입니다. 거기에는 1536년부터 1916년까지의 프로이센 호헨촐레른 왕가 사람들의 석관(Sarkophag; Sarcophagus)이 모셔져 있습니다. 그런데 프로이센 왕으로서 독일 황제(Deutscher Kaiser)를 겸했던 빌헬름 1세와 빌헬름 2세는 베를린 돔이 아닌 다른 곳(빌헬름 1세는 베를린 샤로텐부르크 성 마우솔레움(Mausoleum), 빌헬름 2세는 망명지였던 네덜란드 Doorn)에서 영면하고 있습니다.
베를린 돔(Berliber Dom)
[사진출처 : Arne Hückelheim(optical correction by Johann H. Addicks)]
베를린 돔 내부(개신교 교회 예배당)
[사진출처 : Elemaki in Wikipedia]
베를린 돔 지하묘실에 있는 대선제후(Friedrich Wilhelm von Brandenburg, 1620~1688)의 석관
[사진출처 : Gryffindor in Wikipedia]
베를린 샤로텐부르크성(城) [사진출처 : Times in Wikipedia]
샤로텐부르크 마우솔레움 [사진출처 : Manfred Brueck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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