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라인연방과 라이프치히 전투 (by Peter Brandt)

뇌하수체 2010. 7. 30. 01:24

프랑스의 위성국가(衛星國家)에 해당했던 라인연방(Rheinbund)에 소속되었던 나라들이 나폴레옹과 관계를 단절한 방식은 국가별 지역별로 차이가 있었다. 1790년대부터 프랑스의 영토로 편입되었던 라인강 좌측 지역(linksrheinische Gebiete)은 프랑스 영토로 편입된 이후 낮은 세(稅)부담 등 여러 가지 경제적 이익을 누렸으므로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프랑스에 동화(同化)되었다.

 

그러나 라인연방에 대한 소속감이 강했던 남부독일 국가들과 작센(Sachsen)에서는 비로소 1810년부터 나폴레옹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었다. 나폴레옹이 수행하는 전쟁을 지원하면서 희생이 커지고 있었고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1806)으로 인해 경제적인 압박이 차츰 가중되었기 때문이었다. 라인연방에 가입한 독일 영방국가(領邦國家)들은 원자재 확보와 완제품 판매에서 프랑스 영토로 직접 편입된 지역에 비해 상대적인 불이익을 입었고 프랑스산(産) 제품은 낮은 관세율로 수입되는 반면 프랑스 이외 지역으로 수출하기 위해서는 고율의 관세를 부담해야 했다. 이런 경제적인 요인을 배경으로 하여 라인연방의 식자층(識者層)을 중심으로는 내셔널리즘이 확산되었고 중하위(中下位) 계층에서는 프랑스인에 대한 적대감이 고조되었다.

 

독일 해방전쟁(Befreiungskriege, 또는 자유전쟁 Freiheitskriege, 독립전쟁 Unabhängigkeitskriegen, 1813~1815)이 개시된 1813년 라인연방 소속 각 영방국가들이 취했던 입장은 나폴레옹 통치시기에 누렸던 경제적인 혜택이 어떠했는지 여부에 따라 상이하게 나타났다. 작센은 대륙봉쇄령으로 인해 영국 수입품의 유입이 끊기면서 자국제품의 판매량이 오히려 증가하였으므로 라이프치히 전투(Völkerschlacht bei Leipzig, 1813.10.16~19)에서 나폴레옹의 편에 가담하여 싸웠고 작센 주민들의 나폴레옹에 대한 반감도 전반적으로 낮은 수준이었다. 그에 비해 주로 무역에 의존하는 북해와 발트해 연안의 한자도시(Hansestädte)들에서는 반(反)프랑스 감정이 동(東)프로이센 만큼이나 높았다. 라이프치히 전투 직전 리이트 협정(Vertrag von Ried, 1813.10.8)에 의해 라인연방에서 탈퇴한 바이에른(Bayern)의 경우 나폴레옹에게서 등을 돌리게 된 이유도 고율의 보호관세 문제와 관련이 있었다.

 

바이에른을 제외한 뷰템베르크(Württemberg)나 바덴(Baden)과 같은 남부독일 국가들은 라이프치히 전투 이후 나폴레옹의 패배가 보다 확실해진 것을 확인하고 나폴레옹과의 동맹에서 이탈하였다. 1813년 가을 라인연방의 다른 군소 영방국가들에 대해 전후(戰後) 지위 보장이 약속되면서 대부분의 국가들이 나폴레옹에 대항하는 프로이센-러시아-오스트리아-스웨덴 연합군 편에 가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