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5년 이후 약 50년 동안 프로이센은 유럽 열강의 세력다툼에서 옆으로 비켜나 있었다. 강대국의 지위에서 한걸음 뒤로 물러나 국제정치의 갈등국면에 휩쓸리는 것을 피했다. 프로이센은 이웃나라 강대국들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애썼고 러시아의 주도권을 인정하면서 외교정책을 펼쳤다. 당시 ‘유럽의 헌병(憲兵)'이라고 불리던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1796~1855)는 프로이센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매제(妹弟)이기도 했다. 1825년 러시아 알렉산드르 1세(1777~1825)를 승계한 니콜라이 1세는 프로이센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1795~1861)의 여동생 샤로테(Charlotte von Preußen, 1798–1860)와 혼인하여 슬하에 9남매를 두었고 그들의 큰아들이 훗날 러시아 알렉산드르 2세(Alexander II., 1818~1881)로 즉위하게 된다.
프로이센은 러시아 니콜라이 1세가 영국-프랑스-오스만투르크를 상대로 싸웠던 크림전쟁(1854~1856)에서 중립을 지켰다. 중립을 지키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에 대해 러시아 니콜라이 1세는 “나의 친애하는 처남(妻男)은 밤에는 러시아사람 모습으로 침소에 들었다가 아침에는 영국사람 모습으로 침대에서 일어난다(Mein lieber Schwager geht jeden Abend als Russe zu Bett und steht jeden Morgen als Engländer wieder auf.)“고 썼다. 이런 프로이센의 태도는 당대 유럽사람들이 보기에 유럽 열강들이 모두 참여하여 벌이는 ‘힘의 균형’을 위한 컨서트에서 프로이센이 연주자의 한사람으로서의 지위를 영영 포기한 것으로만 비쳤었다. 그래서 1860년 10월 23일 영국 더 타임즈(The Times) 사설(社說)은 다음과 같이 썼다.
“프로이센은 항상 다른 나라에 빌붙어 산다. 그러면서도 다른 나라를 도울 생각은 전혀 안한다. 국제적인 회의(Kongressen)에는 뻔질나게 참석하면서 전쟁이 벌어지는 곳(Schlachten)에서는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는다. 이상(理想)이니 정서(情緖)니 하는 하는 말잔치에는 열심이지만 쓰디쓴 현실(現實)의 냄새가 나는 곳에서는 늘 발을 뺀다. 프로이센은 대군(大軍)을 보유한 나라이지만 그 군대는 전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닌 듯하다. 어느 나라도 프로이센을 자신의 우방(友邦)이라고 간주하지 않는다. 어느 나라도 프로이센을 경계해야 할 적국(敵國)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프로이센이 어떻게 유럽 열강의 하나로 부상(浮上) 했는지는 역사가 말해주지만, 이런 묘한 나라가 어떻게 아직도 유럽 열강(列强)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인지 그것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프로이센에 대한 이런 통렬한 비판이 나온 지 11년도 되지 않아 프로이센은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는 군사적인, 국제정치적인 대업(大業)을 이루어냈다. 오스트리아를 독일(Germany, Deutschland)의 영역에서 밀어내는데 성공했으며 프랑스의 군사적인 우위를 일거에 무너뜨렸다. 그리고 단일한 독일의 국민국가를 형성해냈을 뿐 아니라 유럽의 세력판도를 급격히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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