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빌헬름 1세와 바이마르 출신 아우구스타 왕비 (by Heinz Ohff)

뇌하수체 2010. 8. 3. 22:09

1862년 1월 2일 빌헬름 1세(1797~1888)가 두 살 위인 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1795–1861)를 이어 왕위에 올랐을 때 그의 나이는 이미 63세였다. 빌헬름 1세는 미남자였으며 1미터 88의 큰 키를 가졌었다. 프로이센 왕실이 나폴레옹에게 베를린을 내주고 동프로이센으로 쫓겨갔을 때 그의 나이는 아홉 살이었으며 열 번째 생일을 망명지인 메멜(Memel)에서 보냈다. 성격이 까다롭고 다소 독선적이었던 큰아들 프리드리히 빌헬름을 모친 루이저 왕비는 더 보살폈다. 둘째아들이었던 빌헬름은 부모들에게 고작 ‘제2 바이얼린(zweite Geige)' 밖에 안되는 존재였다고 빌헬름 1세는 나중에 회고한 적이 있다. 이런 부차적(副次的)인 역할은 부모가 돌아가신 후에도 한참 계속되었으며 1861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바뀌었다. 모친 루이저 왕비 임종시 빌헬름은 13살이었다. 빌헬름 1세는 고령(高齡)이 되어서도 수레국화(cornflower, Kornblume)를 선물받으면 기뻐했었는데 수수한 모습의 수레국화는 모친 루이저 왕비가 좋아하던 꽃이었다. 문학작품에서 낭만적으로 그려지는 파란 빛깔의 꽃을 그의 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무척 좋아했으나 빌헬름 1세는 그런 낭만적인 정서와는 거리가 멀었다.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냈던 엘리자 라드치빌(Elisa Radziwill, 1803~1834)과의 혼인이 신분상의 차이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최종 확정된 후 1829년 빌헬름은 바이마르의 아우구스타(Augusta von Sachsen-Weimar-Eisenach, 1811~1890)와 결혼을 했다. 그의 나이 32살 때였다. 엘리자 라드치빌은 그로부터 5년 후 결핵에 걸려 사망하였다.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는 7살이던 아우구스타를 위해 시를 지어 헌정(獻呈)한 적이 있었고 쉴러(Friedrich Schiller, 1759~1805)의 미망인은 2살짜리 아우구스타가 “매우 의지가 강해서 한번 잡은 것을 좀처럼 놓으려 하지 않는다”고 말했었다. 아우구스타 왕비는 강하고 흔들리지 않는 성격으로 프로이센 역사와 독일 문화사에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빌헬름 1세의 전기(傳記)를 쓴 프란츠 헤어러(Franz Herre)는 아우구스타 왕비에 관하여 “평균 이상의 재능과 학식을 갖추었고 강인한 성격을 가졌으며 나이가 들어가면서 남의 말을 귀담아 듣기 보다는 자기 생각을 강하게 피력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적었다. 평균 이상의 재능과 학식을 가진 여성들이 프로이센에서 지내기가 쉽지 않은 시대가 되어 있었다. 프리드리히 1세의 부인 소피 샤로테 왕비의 일은 이제는 그저 과거지사(過去之事)가 되어버린 것이다. 아우구스타와 같은 여성은 블루스타킹(Blaustrumpf, blue stocking) 그룹이나 소크라테스의 부인 크산티페(Xanthippe)와 같은 취급을 받기 십상이었다. 아우구스타 왕비는 괴테와 쉴러, 헤르더(Johann Gottfried Herder, 1744~1803), 비이란트(Christoph Martin Wieland, 1733~1813) 등을 후원하면서 바이마르 궁정문화(Weimarer Klassik)를 활짝 꽃피웠던 카알 아우구스트(1757~1828)의 손녀였으며 러시아 에카테리나 대제의 외손녀이기도 했다. 1858년 빌헬름 1세가 61살 때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빌헬름(1831~1888)과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딸 비키(Victoria von Großbritannien und Irland, 1840~1901)가 결혼을 한 것은 아우구스타 부인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나 빌헬름 1세는 스스로는 단 한번도 원한 적이 없었던 프로이센왕의 자리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빌헬름 1세는 누구도 그에게 그런 역량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지 못했던 통치의 기술을 하나 터득해 냈다. 그의 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성공하지 못했던 적재적소(適材適所)의 인사정책(人事政策)을 상당히 훌륭하게 운용했다. 임무에 적절한 사람을 잘 찾아 중용(重用)하였으며 등용(登用)된 인물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었다. 근대적인 입헌 군주제 국가와 같이 통치조직을 운용했다. 프로이센 헌법이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 1815~1898)와 같은 인물을 미리 예상했었더라면 전쟁을 포함한 국정(國政) 일반은 총리(Ministerpräsident)가 담당하고 국왕은 국가수반으로서 상징적인 존재로 규정되었을 것이다. 빌헬름 1세는 그와 같은 명분화된 헌법 규정 없이 비스마르크를 그런 존재로 만들어 국정을 운용했다. 비단 비스마르크의 경우만이 아니었다. 자기보다 6살이 적었던 룬(Albrecht von Roon, 1803~1879)이 자기보다 더 잘 국방장관의 직(職)을 수행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몰트케(Helmuth Karl Bernhard von Moltke, 1800~1891)가 자기보다 더 군(軍)개혁이나 전략전술 수립운용을 잘 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해당 업무를 전담시켰다. 82살의 나이에 직접 군대를 지휘하여 승리를 거두고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던 오스트리아의 라데츠키 장군(Josef Wenzel Radetzky von Radetz, 1766~1858)의 경우처럼 빌헬름 1세에 대한 프로이센 국민들의 지지도 차츰 높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