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3세(1831~1888)는 호헨촐레른 왕가 최초의 대학생이었다. 위정자(爲政者)나 후원자(後援者)의 지위가 아니라 학생의 신분으로 대학을 다녔다. 대학에 다닐 것을 권유한 사람은 모친 아우구스타 왕비였다. 본(Bonn) 대학을 선택한 것도 모친이었다. 본 대학은 프리드리히 3세의 조부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가 설립한 대학이었다. 본(Bonn)은 당시 프로이센 자유주의자들의 아성(牙城)이었다. 라인란트는 산업화(産業化)가 진행되면서 농촌지역에 기반을 두었던 융커세력(Junkertum)에 맞서는 자유주의자들의 요람(搖籃)으로 떠올랐다. 라인란트는 또한 지방행정 개혁을 추진하던 슈타인(Stein)이 민주주의적인 자율행정의 모델이라고 생각했던 지역이기도 했다.
본(Bonn)에서 활발히 논의되고 있었던 개혁적인 이념은 대부분 영국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영국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민주주의가 발달한 나라였다. 아우구스타 왕비는 아들에게 특히 프리드리히 크리스토프 달만(Friedrich Christoph Dahlmann, 1785~1860) 교수의 강의에 빠지지 말 것을 당부했다. 달만 교수는 1837년 하노버 왕국이 헌법을 폐지한 것에 항의하다가 해직된 '괴팅겐 대학의 7인(Göttinger Sieben)'의 한 사람이었고 그로 인해 하노버에서 추방되어 프로이센에 왔다. 달만 교수는 영국의 입헌군주제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대변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프리드리히 3세는 달만 교수에게서 국가학(國家學)과 법률제도를 배웠고 영국의 역사와 헌법에 대해서도 공부를 했다. 프리드리히 3세는 대학 기숙사에서 다른 학생들과 함께 생활했고 동료들의 두터운 신망을 받았다. 학업을 마치고 대학을 떠날 무렵 동료 학생들은 프리드리히 3세를 위해 자발적으로 횃불행진(Fackelzug)을 하며 그의 대업(大業)을 기원했다.
1851년 영국 런던의 크리스털 팰리스(Crystal Palace)에서는 만국박람회가 개최되었다. 빅토리아여왕(1819~1901)의 부군인 알버트공(公)이 맡아서 준비한 행사했다. 알버트공(Albert von Sachsen-Coburg-Gotha, 1819~1861)은 독일 출신으로 영국의 자유주의와 기술혁신을 다른 나라에 적극 소개하고 있었다. 엄청난 규모의 전시관에는 최신의 공산품(工産品)이 진열되어 당시 유럽 제1의 선진국인 영국의 면모를 여실히 자랑하고 있었다. 엔지니어들이 만들어내 제품들은 정치적인 구호 이상의 효과가 있었다. 프리드리히 3세의 부관이었던 몰트케(Moltke)는 런던에서 열리는 만국박람회가 나중에 왕위에 오를 사람이면 반드시 보아야 할 행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시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주변의 측근들은 프리드리히 3세의 영국여행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3세에게는 다른 방도가 있었다. 백부(伯父)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에게 직접 요청을 한 것이다. 조카의 요청이면 언제나 잘 들어주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왕명(王命)을 내려 영국여행을 허락해주었다.
부모와 함께 영국을 한번 방문한 적이 있었던 프리드리히는 몰트케의 안내를 받아 크리스털 팰리스를 보면서 지금이 역사적으로 어떤 시기인지를 실감했다. 게다가 프리드리히는 빅토리아여왕과 알버트공의 따뜻한 환대까지 받았다. 빅토리아여왕과 알버트공은 통상 왕실의 부부사이와는 달리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면서 결혼생활을 영위했다. 빅토리아여왕은 독일 출신 알버트공과 함께 9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첫째가 “비키(Vicky)"로 불리운 당시 10살짜리 딸 빅토리아(1840~1901)였다. 19살이던 프리드리히는 10살의 소녀 비키를 사랑하게 되었다. 비키가 14살 되던 해에 두 사람은 약혼을 했고 긴 약혼기간을 보낸 후 비키가 17세가 되고 나서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양가(兩家) 모두 두 사람의 혼인을 흡족해했다. 빅토리아여왕은 독일 출신 알버트공과의 결혼생활이 내내 행복했으므로 프로이센 출신 사위를 반겼다. 그러나 한동안 비밀로 했었던 두 사람의 약혼사실을 알아낸 영국의 타임즈(Times)는 당시 사설(社說)에서 ”전도(前途)가 양양(洋洋)한 영국의 공주를 연륜(年輪)이 보잘 것 없는 왕실에 넘기주는 것“이라고 논평했다. 프리드리히 3세가 장차 독일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될 것이라고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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