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전쟁의 신 마르스와 상업의 신 머큐리 (by Harold James)

뇌하수체 2010. 8. 6. 20:03

19세기 전반기에 독일은 영국 보다 경제적으로 뒤처져 있었다. 당시 빠른 속도로 산업화가 진행되었던 영국을 바라보는 독일사람들의 주관적인 생각도 그러하였지만 경제사적(經濟史的)인 연구 결과는 좀더 구체적인 차이를 보여준다. 1820년 독일의 1인당 GDP는 영국의 68% 수준이었다. 1850년을 전후로 하여 독일경제는 상당한 호조를 보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1870년 독일의 1인당 GDP는 영국의 55% 수준으로서 그 격차가 더 벌어졌다(Angus Maddison, 「Phases of Capitalist Development」, Oxford 1982). 경제적 침체로 인해 독일인들의 해외 이주도 늘어났다. 1820년 8천5백명이던 해외이주민은 1830년대에는 16만 7천7백명, 1840년대에는 무려 46만 9천3백명으로 늘어났다. 당시 프로이센을 포함한 독일 전체 인구는 약 3천만명 수준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D. Borschardt, Germany 1700~1914, in : C. M. Cipolla 편, Fontana Economic History of Europe, 제41권, London 1973).

 

영국 보다 10년이 늦은 1835년에 독일에서도 철도가 개통되었다. 뉘른베르크(Nürnberg)와 퓌르트(Fürth) 사이 6km의 짧은 구간이었다. 그러나 독일의 철도 건설이 활발해지면서 1848년까지 총 5천km로 늘어났고 1870년에는 총 연장 1만8천km로 증가하였다. 기차는 사람들과 생각들의 교류를 촉진시켰다. 시장(市場)이 통합되면서 상호간의 의존성이 높아졌고 독일의 통일이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 1870년 독일제국이 정식으로 탄생하기 이전에 이미 독일 각 지역은 철도를 매개로 하여 통일국가에 대한 관념을 형성하고 있었다. 쾰른(Köln)의 경우가 가장 인상적이다. 쾰른의 기차역은 고딕양식의 쾰른 대성당 바로 옆에 건설되어 카톨릭 교회와 개신교의 통합과 라인란트의 전통과 베를린의 통합을 상징하고 있다. 기차가 호헨촐레른철교(鐵橋)를 지나 라인강을 건너오면 쾰른대성당에 도착한다. 일설(一說)에 의하면 낭만주의자였던 프로이센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쾰른대성당 옆에 철도역을 건설하도록 했다고 한다.

 

한편, 1834년 프로이센 주도로 작센과 남부독일 국가들이 가입했던 관세동맹(Zollverein)이 1871년의 독일통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견해가 정설(定說)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관세동맹의 출범 배경을 자세히 살피면 다소 납득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1829년 6월 당시 프로이센 재무장관이던 모츠(Motz)가 “정치적인 통일에 앞서 경제적인 통합이 우선되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던 메모를 읽어보면 관세동맹을 독일통일의 필수불가결한 전(前)단계로 생각했던 것은 아니며 단순히 오스트리아와 인접한 남부독일의 바이에른(Bayern)을 친(親)프로이센-반(反)오스트리아 그룹에 묶어놓기 위한 외교적인 방편일 뿐이었다. 프로이센은 1820년 이후 관세동맹을 오스트리아의 주도권을 견제하는 방안의 하나로 활용했다. 그러나 프로이센 주도의 관세동맹이 독일통일에 대한 문제의식을 확산시킴으로써 1830년 프랑스 7월혁명에 영향을 받은 독일 민족주의자들은 독일 전역에서 세관(稅關)을 습격하고 파괴하기도 하였다.

 

1850년 이후에는 바이마르의 괴테 보다 국민경제(Nationalökomomie)가 더 중요한 관심사가 되었다. 본(Bonn) 대학의 지벨(Heinrich von Sybel, 1817~1895) 교수는 1862년 “관료주의 국가이자 군국주의 국가인 프로이센은 공익(公益, Gemeinwohl)을 최고의 국가목적으로 삼고 경제적 풍요로움을 확보하는 것을 국가의 가장 중요한 임무라고 생각하면서 신분적 특권이나 사리사욕(私利私慾)을 타파하였고 교황권(敎皇權), 종파(宗派), 교회 등 중세적(中世的)인 과제 대신에 합목적성, 이용가능성, 발전성 등 차원에서 국가의 모든 역량을 결집하는 정책(Realpolitik)의 수립과 집행에 주력하였다.”라고 썼다. 1873년 랑케(Leopold von Ranke, 1795~1886) 교수의 후임으로 베를린 대학에 부임하게 되는 트라이치케(Heinrich von Treitschke, 1834~1896)는 1872년 “전쟁의 신 마르스(Mars)와 상업의 신 메르쿠어(Merkur)가 19세기 유럽국가들이 최고의 수완을 발휘하여 수행해야 하는 과제를 상징한다. 호헨촐레른 가문의 프로이센왕이 독일제국의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군대’와 ‘경제정책’ 두 가지 때문에 가능했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