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Once upon a time in Amerika ( in: 작센신문, 1998.1.17)

뇌하수체 2010. 9. 6. 23:36

아메리카 마을 사람들은 독일철도회사(DB)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다. 철도회사에서 ‘아메리카’라는 마을이름이 적힌 표지판을 떼어버렸기 때문이다. 마을주민 카알라 리히터씨에게 그것은 “용서할 수 없는 짓”이었다. 동서독 통일이후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난 다음에도 아메리카 마을사람들은 그저 담담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큰 공장이 문을 닫으면서 어린이집이, 가게가, 의사가, 우체국이, 그리고 볼링장까지 함께 사라져버렸다. 시대가 바뀌어 버린 것이다. “그런 건 그렇다 치더라도, 예전 기차역에 있던 우리 마을 표지판까지 떼어갈 이유는 없잖아요?” 이 마을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고 있는 카알라 리이터씨는 화를 내면서 장롱속에서 지도 한 장을 꺼내왔다. “대서양을 건너 여행을 할 만한 돈이 없는 사람은 물더(Mulde)강(江) 계곡에 있는 ‘아메리카’로 가는 기차를 타라”.

 

물더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바로 아래로 두 시간 마다 한번 씩 기차가 지나가고 거기에 마을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마을의 상징물이었다. 아메리카 마을을 방문하는 사람은 작센지방 시골마을이 가진 기이한 이름 때문에 마을 표지판 앞에서 기념사진들을 찍곤 했다. 그 마을 표지판을 철거한 후 철도회사는 서독식으로 통일된 새로운 형태의 기차역 표지판을 플랫폼에 세웠으나, 그 새로운 표지판이 세워진 자리에서는 사람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을 듯 했다.

 

우편번호 09322, 작센주 페니히 시(市)의 아메리카 마을. 주민수가 모두 합쳐 100명 정도인 이 마을의 이름이 ‘아메리카’가 아니었으면 아마도 이 마을은 외부세계로부터 이미 오래전에 잊혀졌을 것이다. 마을사람들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예전에 방직공장이었던 건물 위로는 백록과 백청의 깃발 사이로 미국 성조기가 펄럭이고 있는지 모른다. 마을주민 요세프 콜머씨가 게양한 깃발이었다. 콜머씨는 바이에른 지방 출신으로 아메리카 마을에 매력을 느껴 이주한 사람이다. 그는 지금 건축업를 운영하면서 앞으로 이 마을에 자동차 폐차장을 세워 운영할 계획이다. “바이에른의 우리 고향사람들은 내가 아메리카로 간다는 것을 전혀 믿지 않더군요.”라고 말하며 콜머씨는 히죽 웃었다.

 

파란색 작업복을 입은 41세의 콜머씨는 공장건물 지붕 위에 올라가 저 앞에 펼쳐진 3만 5천평의 텅 빈 대지를 바라보면서 “아직 손 볼 곳이 많지만 저 땅에서 무엇인가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콜머씨는 동서독 통일 후 급속히 쇠락한 아메리카 마을에 생기를 불어넣을 것으로 기대되는 세 명의 젊은 투자자들 중 한 사람이다. 마을 이장은 이들을 ‘개척자들’이라고 불렀다. 콜머씨는 금속가공업을 하는 마을주민 외르크 슈타인브루너씨의 소개로 아메리카 마을을 알게 되었다. 31세의 슈타인브루너씨는 콜머씨와 같은 바이에른 지방 출신으로 통일 이후 가동이 중지되었던 수력발전시설을 재가동시켰고 예전의 대장간 건물을 박물관으로 재탄생시켰다.

 

아메리카 마을은 러시아인들과도 관련이 있다. 100년 전에 세워진 공장건물 한 곳에는 하얀색의 거대한 위성수신기가 다른 시대에서 날아온 낯선 물체처럼 설치되어 있다. 34세의 통신기술 엔지니어 데틀레프 드레브스씨가 주로 동유럽을 대상으로 위성수신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구 동독 인민군(NVA)에 복무했던 드레브스씨는 소련군이 폐기한 군사기술을 이용하여 체첸의 그로즈니, 알바니아의 티라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사라예보 등 분쟁지역에 대한 위성수신서비스 제공에 주력하고 있다. 브란덴부르크 출신 드레브스씨는 아메리카 마을 인근 지역 출신인 부인 산드라를 만나 아메리카에 왔으며 공장 부설 어린이집을 사들이고 사무실과 집을 장만했다. 드레브스씨는 아메리카가 위성통신기술의 전진기지로서 최적의 조건을 갖추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물더강은 츠비카우(Zwickau)시(市) 알텐부르거 방직공장(Alwo Werk) 옛 공장터를 휘감아돌며 잔잔하게 흐르고 있다. "Alwo Werk II"라는 현판이 아직 걸려있다. 사실 아메리카는 1836년 40여개의 건물로 이루어진 제사(製絲)공장이 설립되면서 마을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구 동독시절에는 국영기업(VEB) 형태로 운영되었던 공장이다. 작은 기차역이 있었고 52채의 주택이 들어선 2개의 주거지역이 있었다. 몇 개의 주말농장이 있었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이 공장 출신 일곱명의 전사자를 기리는 기념비도 있었다. 한때는 1천여명이 넘는 근로자가 일하고 있었던 이 공장에는 동서독 통일 후 공장문을 닫기 시작했던 1992년까지만 해도 아직 500여명의 근로자가 일하고 있었다. 그 후 수년 동안 아메리카는 침체되었고 녹슬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결국 유령의 마을이 되었다. 먼지가 자욱히 내려앉은 텅 빈 건물의 벽에는 “수영장”, “보건소” 또는 “소방서”와 같은 글귀만 유령처럼 남아있다.

 

작은 마을 아메리카는 시장경제시스템에서 휘청거린 동독경제의 모습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이다. 'Alwo'가 공장문을 닫으면서 160명이었던 마을주민 중 60명이 마을을 떠났다. 실업자와 연금생활자만 마을에 남은 셈이다. 독일 신탁청은 이 공장시설을 어찌 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그러던 중, 백마 탄 기사가 나타난 듯 싶었다. 요양시설을 만든다느니, 대규모 유흥업소를 유치한다느니, 복합 물류단지가 들어선다느니, 여러 가지 말들이 많았지만 그러나 결국은 아무것도 이루어진 것이 없었다. 그러다가 대규모 놀이시설을 만들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그래서, 미국 신문에 “Amerika for sale"이라는 광고를 내기도 했고, 로스엔젤레스 박람회에서는 ”wild west park" 부지로서 1천만 마르크의 헐값에 내놓기도 했다. 다행히 카우보이의 나라에서는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었다. 1995년 페니히(Penig) 시(市)는 독일 신탁청에 1천7백만 마르크를 지불하고 아메리카를 구입했으며 그간의 모든 꿈같은 프로젝트를 땅에 묻었다. 페니히 시의 시장 토마스 오일렌베르거씨는 “천천히 가는 것이 알차게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변호사를 대동하고 나타나는 줄무늬 양복맨들 보다 총명한 ‘개척자들’ 몇 명이 훨씬 낫다"고 판단하고 있다.

 

마을주민 카알라 리히터씨는 이곳에서 앞으로 언젠가 근사한 “아메리카 비어가르텐”을 열 수 있기를 꿈꾸고 있다. 방직공장에서 34년 동안을 일했던 리히터씨는 탁 트인 정자(亭子) 형태의 비어가르텐에 병맥주는 좀 가져다 놓을 생각이지만, 여행자들에게는 배낭에 넣어 온 빵을 꺼내 버터에 발라먹으며 쉴 수 있는 공간이 되게 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 ‘아메리카 비어가르텐’에서는 왜 이 마을 이름이 ‘아메리카’인지도 알려주고 싶다. 1836년 경 이 지역 물더강 계곡(Muldental)으로 가는 길이 아직 없었을 때 염색공장으로 일을 하러 가는 사람들은 배를 타고 물더강을 건너야 했었다. 강을 건너면서 그들은 “으랏차차~, 우리는 미국으로 간다(Ri-Ra-Rutschika, wir fahren nach Amerika)"라고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옮긴이 - 2010년 6월 31일 현재 ‘아메리카’ 마을 주민은 총 79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