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딸들(daughters and sisters)의 왕위계승권

뇌하수체 2010. 9. 8. 13:11

로마시대에는 아들 딸 구별없이, 또 큰딸 작은딸 차별없이, 자식들이 골고루 상속권을 나누어 가졌다고 합니다만, 중세 서유럽국가에서는 아들이 없는 경우에 한하여 딸에게 상속권이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 경우에도 남편이 「jure uxoris("By right of his wife")」라고 표시를 붙여 일종의 법정대리권을 행사하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그러나 왕가(王家)의 상속 관련 규정은 그 가문에 대해서만 적용되었으므로 중세 이후에도 예컨대 외조카에게 상속권이 있는지 고종사촌에게 상속권이 있는지 여부가 법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았고 대부분 실력행사에 의해 각자의 주장을 관철하였습니다.

 

왕위계승 다툼에서 딸들이 비교적 선선히 아들들에게 양보를 한 것에 비해 아들들간의 다툼은 비교적 길게 이어졌습니다. 독일의 경우 왕위 또는 제후지위를 큰아들이 물려받는다는 장자상속제는 1356년 금인칙서에 의해 신성로마제국 차원에서 처음 규정되었는데, 이 금인칙서가 규율하는 것은 7명의 선제후(Kurfüsten)에 한정되었으므로, 수천명에 이르렀던 제후(Fürsten)들 가문의 상속 메카니즘의 전모를 밝히는 것은 뜻있는 분들의 딜레땅뜨한 추후 연구과제로 남겨두어야 하겠습니다. 오토대제(Otto I., der Große, 912~973)와 그의 동생 바이에른의 하인리히(Heinrich I. (Bayern), 919~955)가 형제간에 피터지게 싸운 얘기는 그러므로 생략하고 넘어갑니다. 독일 제후들의 장자상속제도는 ‘동화(童話)의 아저씨’들 그림형제(Grimm brothers, 야콥 그림, 1785~1863, 빌헬름 그림, 1786~1859)의 고향 하나우(Hanau)의 제후가 1375년에 남긴 문건이 최초라고 합니다만, 북독일 메클렌부르크 제후 가문 아들들은 1701년 함부르크에서 합의(Hamburger Vergleich)를 볼 때까지 티격태격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유럽 왕실의 대세(大勢)는 장자상속제(Primogeniture)였습니다. 큰딸도 아니고, 작은아들도 아니고, 오직 큰아들내미 하나가 오롯하게 왕위와 모든 재산을 물려받는 장자상속제는 서유럽에서, 그러나, 네 가지 형태로 존재했거나 존재합니다. 이 네 가지 형태를 음미하면, 일치감치 아들들에게 양보하고 무대를 떠난 딸들의 귀환이 눈에 띕니다. 대한민국의 딸들, 더욱 힘내시기 바랍니다. 차남(次男)들에게는 여전히 국물도 없습니다. 장남이 아닌 아들들에게 그러나 전혀 ‘국물’이 없었던 것은 아니고, ‘애퍼니주(Apanage)’라는 국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애퍼니주’는 그저 국물일 뿐, 왕자(王者)의 자리를 넘보는 메인(main) 메뉴가 아니었습니다. 큰딸들, 그러니까 누나들은, 귀환을 했는데 남동생들에게는 여전히 국물도 없는 ‘the winner takes all'의 메카니즘에 관하여 스코트랜드 출신 대(大)경제학자 아담 스미스(Adam Smith, 1723~1790)는 “논 꼴랑 스무 마지기 되는 거, 여러 형제들이 쪼개서 경작을 해서는 채산성을 맟출 수 없다. 한 사람이 다 가져야 장사가 된다”는 요지의 글을 기록으로 남기기도 했습니다. 장자상속제가 확립되지 못했던 남독일에서는, 농사를 지어서는 모두들 먹고 살기 힘들었으므로 ’뻐꾸기 시계‘ 같은 수공업이 더욱 발달했다는 흥미로운 연구논문이 있기는 합니다.

 

유럽왕실 장자상속제(Primogeniture)의 네 가지 형태

유 형

내 용

적용사례

부계(父系)상속

(agnatic

primogeniture)

샐릭법형

(the Salic

law)

①딸 왕위계승 불가

②외손자 등에 의한 계승도 불가

구 프랑스왕국

반(半)샐릭법형

(the

semi-Salic

principle)

①여성 왕위계승 불가

②부계혈족 남성이 없는 경우에 한하여 외손자 등에 의한 계승 가능

룩셈부르크

(신성로마제국)

양계(兩系)상속

(cognatic

primogeniture)

부계우선형

(Male

preference

primogeniture)

⒜살아있는 아들이 없고 ⒝죽은 아들의 자손도 없을 때에 한하여 딸이 왕위계승

영국

스페인

모나코

남녀평등형

(absolute

cognatic

primogeniture)

아들/딸 구별없이 첫째 가 상속

스웨덴(1980)

네덜란드(1983)

노르웨이(1990)

벨기에(1991)

덴마크(2009)

 

옛 프랑스왕국 시절, 여자를 왕위계승이라는 밥상머리에 아예 앉히지 아니했던 때의 법(法)체계를 샐릭법(the Salic law)이라고 부릅니다. 여자는 절대로 왕이 될 수 없고, 모계(母系)를 근거로 한 왕위계승도 불가하다는 입장입니다. 예전 프랑스 왕국의 전통적인 규율입니다. 프랑스왕국 카페 왕조 샤를마뉴 4세(1295~1328) 사후(死後)에 영국의 에드워드 3세(샤를마뉴 4세의 외손자)와 프랑스 발루와 왕조의 필립 6세(샤를마뉴 4세의 고종사촌)가 왕위계승을 놓고 벌인 싸움이 백년전쟁(1337~1453)의 발단이 되었는데, 프랑스 왕국은 아마도 자신들의 정당성을 이 샐릭법 규정에서 찾았던가 봅니다.

 

프랑스왕국의 샐릭법을 여성에게 다소 유리하게 변형한 것이 반(半)샐릭법(the semi-Salic)입니다. 이 규정은 여성이 왕이 될 수 없다는 점은 샐릭법과 같으나, 부계혈족 남성이 없으면 모계를 통한 왕위계승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즉, 외조카, 외손자가 외삼촌, 외할아버지의 왕위를 계승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딸 스스로, 그러니까 여성이 왕이 될 수는 없다는 입장입니다. 신성로마제국(독일 중세와 근세)에서 왕국과 제후국들이 대체로 이런 내용의 가문(家門)의 전범(典範)들을 마련했었다고 합니다. 이런 전범을 벗어나서, 1713년 오스트리아 카알 6세(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왕실전범에 관한 칙령(Die Pragmatische Sanktion)을 발표하여 그 때까지 불문율처럼 여겨진 ‘세마이 샐릭법’에서 벗어나는데 카알 6세가 시도하였던 내용을 보면 첫째, 큰아들이 상속을 받고(형 먼저의 원칙) 둘째, 큰아들 대가 끊기면 남자동생들 또는 그 자식들이 상속을 받으며, 셋째, 이런 아들들도 없으면 마지막 왕위계승권자의 딸(언니먼저 원칙)이 왕위를 계승한다는 것입니다. 핵심은 딸도 왕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이 전범에 따라 그 전범발표 3년 후인 1717년에 태어난 딸 마리아 테레지아(1717~1780)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는데 이것이 프로이센 프리드리히 대왕의 슐레지엔(당시 오스트리아 대공 겸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지배하던 오늘날 폴란드 남부와 체코 북부 지역) 침공의 명분이 되기도 했습니다.

 

서유럽의 이단자(異端者) 영국은 조금 다른 규정을 마련했습니다. 이른바 부계(父系) 우선 장자상속제도(Male preference primogeniture)라는 것입니다. 이 왕실전범은, 아들들이 없고, 그 자손도 없을 때에는 딸이 왕위를 계승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조선왕조에서 강화도령 철종이나, 대원군 아들 고종을 찾는 것 같은 번거러움 없이, 딸들이 바로 왕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영국의 이런 왕실규범에 따라 1837년 윌리엄 4세 사후 영국 왕실은 윌리엄 4세의 조카인 빅토리아 여왕이 왕위를 승계하였고, 신성로마제국의 ‘세마이 샐릭’ 법체계를 따랐던 독일의 하노버 왕실은 윌리엄 4세의 남동생 에른스트가 하노버왕위를 승계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남녀 완전평등 장자상속 제도(Absolute cognatic primogeniture)가 1980년 서유럽에 등장합니다. 스웨덴 왕실이 그 효시(嚆矢)가 되었습니다. “아들딸 구별말고 첫째가 왕이 된다”는 원칙입니다. 기독교의 영향이 컸던 중세 유럽에서는 ‘혼인외의 자’ 또는 ‘첩(妾)의 자식들’에게 상속권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대(代)가 끊기는 가문이 적지 않았고, 왕실 또한 예외가 될 수 없었습니다. 후궁(後宮)이나 첩의 자식들에게 상속권을 주지 않는 유럽왕실로서는 대가 끊기는 것을 피하기 위해 딸들에게 왕위계승을 허여(許與)하는 것이 부득이해 보입니다. 동아시아의 유일한 왕가 일본도 마찬가지라고 여겨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