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제3제국의 잔해 위에 세워진 나라 서독과 동독 (by Herfried Münkler)

뇌하수체 2011. 1. 23. 23:23

 

폐허가 된 제3제국(Großdeutsches Reich)으로부터 서독과 동독, 그리고 오스트리아 등 세 개의 나라가 세워졌다. 이들 세 나라는 나치독일의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국가이념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공통적인 운명에 놓여 있었으며 스스로를 다른 두 나라와 차별화함으로써 고유의 정체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과제를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기도 했다. 1938년 나치독일에 “강제병합(Anschluss)"되었다는 점을 근거로 ”히틀러의 첫 번째 희생양(Hitlers erstes Opfer)"이라고 인정되었던 오스트리아가 가장 유리한 상황에 있었으며 이로써 오스트리아는 나치독일의 범죄에 대한 책임을 면하면서 국가의 고유한 정체성을 형성해 갔다.

 

 

독일연방공화국(BRD, 서독)과 독일민주공화국(DDR, 동독)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으며 이들 두 나라는 보다 엄격히 나치독일의 과거로부터 선을 그어야만 했다. 이를 위해 서독이 화폐개혁과 경제발전이라는 경제적인 측면을 강조했던데 비해, 동독은 안티파시즘과 나치에 대한 저항운동을 내세워 나치독일과의 역사적 단절을 선언했고 동독 공산당(SED, 사회주의통일당)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독일의 정통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서독을 향해 동독은 제3제국의 계승자로서 나치독일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했다고 끊임없이 비난했다. [1968년 동독 공산당 서기장 울브리히트(Walter Ulbricht, 1893~1973)는 “파시즘은 국가 주도로 군사력을 앞세워 비인간적인 시스템을 만들어낸 독점자본의 공격주의적이고 팽창주의적인 형태”라고 교시한 바 있는데, 울브리히트의 파시즘에 대한 인식은 1930년대 코민테른 이론가 게오르기 디미트로프(Georgi Dimitrov, 1882~1949)의 정의, “파시즘은 금융자본이 주로 국수주의적 제국주의적 경향에 편승하여 공포정치를 일삼는 독재자를 통해 구현되는 것”과 유사한 것이며, 나치독일의 패망 후 근 25년이 지난 다음 울브리히트가 새삼 파시즘을 다시금 공격한 것은 서독을 파시즘이 계속되고 있는 국가로 규정하고 동독을 "안티파시즘의 보루(antifaschistischer Schutzwall)"라고 자처하기 위한 것이었다.]

File:Georgi Dimitrov 1882-1849.jpg
게오르기 디미트로프(1930년)

 

 

이에 대해 서독은 1953년 6월 17일에 일어난 동독주민의 봉기가 소련군의 탱크에 의해 진압된 사실을 지적하면서 비민주적인 동독정권의 정통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응수했고 동독의 아킬레스건에 해당하는 경제적인 궁핍함을 특히 강조했다. 1953년 6월 17일 이후 동독이 서독과 정통성 경쟁(Legitimitätskonkurrenz)을 벌였던 시기에 동독은 ‘서독의 유일 합법정부론(Alleinvertretungsanspruch)'이나 할슈타인 독트린에서부터 서독산 폴크스바겐 자동차 1만대 수입이나 서독으로부터 차관도입의 지속적 증가 등 상황에 이르기까지 서독에 대해 지속적인 열세에 놓여 있었다. 동독 공산당 호네커(Erich Honecker, 1912~1994) 서기장이 1987년 9월 서독을 실무방문(Working Visit; Arbeitsbesuch)하여 콜(Helmut Kohl) 총리의 영접을 받은 것이 호네커의 가장 큰 외교적인 성과였다고 평가될 정도로 동독은 스스로 붕괴된 시기까지 서독으로부터 정치적으로 인정을 받기 위해 전력을 다하였으나, 서독은 동독과 달리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어려웠었다. 서독은 헌법전문에서부터 본(Bonn)의 정부청사건물에 이르기까지 분단국가의 임시적인 성격(Provisoriumscharakter)을 일관되게 강조해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