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 1월 북아프리카 모로코의 카사블랑카에서 열린 연합국 수뇌부 회담(Casablanca Conference, 1943.1.14~16)에서 독일에게 ‘무조건 항복’을 할 것을 요구하면서 전후 독일의 미래는 연합국들이 결정하는 것으로 예정되었다. 1943년 11월부터 1945년 5월 종전 때까지의 기간 중에는 소련이 독일의 미래에 대한 논의를 주도하였다. 스탈린은 1941년 6월 22일 시작된 독일군의 공격으로 입은 막대한 피해와 독소 양국민간의 적대감에 입각하여 독일문제를 접근하였다. 1943년 11월에 열린 테헤란 회담(Tehran Conference, 1943.11.28~12.1)에서 스탈린은 영국 처칠 수상과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이 가지고 생각하고 있는 계획이 독일 민족주의의 재등장을 막기에는 너무 허술하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스탈린은 독일국민들이 권위주의적인 국가권력에 얼마나 굴종적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1907년 라이프치히(Leipzig) 노동자들이 기차의 검표원을 기다리는 바람에 대규모 시위가 실패로 돌아갔다는 점을 예시하기도 했다. 루스벨트는 독일어에서 "제국(Reich)"이라는 낱말을 아예 없애버릴 것을 제안했고 그것을 위해서는 독일이 여러 개의 소국으로 분할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1882~1945)는 스탈린(Josef Stalin, 1878~1953)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독일을 7개의 소국으로 분할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처칠(Winston Leonard Spencer-Churchill, 1874~1965)은 스탈린의 얘기에 대해 보다 회의적이었으며, 유럽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독일 군국주의의 원천인 프로이센을 해체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프로이센을 단일한 행정단위로 두지 않고 분할해체하는 문제는 종전 후 독일의 미래에 대해 연합국들이 취한 중요한 조치 중 하나가 되었었다. 그러나 테헤란 회담 당시 독일문제(German question; Deutsche Frage)는 어떠한 최종적인 합의도 없는 상태였다. 테헤란회담 이후 독일의 미래에 관한 문제는 유럽자문위원회(EAC, European Advisory Committee)로 넘겨졌고 여기에서 연합국 점령군의 지역별 군정(軍政)에 관한 초안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EAC와 별도로, 당시 미국 재무장관 헨리 모겐타우(Henry Morgenthau, 1891~1967)의 계획과 같이 독일을 분할하여 농업국가로 만든다는 구상도 제시되었다. 테헤란 회담에서 스탈린의 견해에 영향을 받은 루스벨트 대통령은 1944년 9월 개최된 제2차 퀘벡회담(Quebec Conference, 1944.9.12~16)에서 모겐타우 재무장관의 계획을 받아들였고 처칠도 여기에 서명을 했다. 1945년 2월의 얄타회담(Yalta Conference, 1945.2.4~11)에서도 독일의 산업시설을 완전히 제거해버린다는 목표가 재확인되었다. 소련이 프랑스를 연합국 수뇌부 회담에 참석하는 것을 반대한 것 말고는 독일의 미래에 관하여 연합국간의 견해차이는 없었다. 프랑스는 미국과 영국의 점령지역 일부를 양도받아 점령국가의 지위를 차지하였으나 얄타회담 이후 개최된 포츠담회담(Potsdam Conference, 1945.7.16~8.2)에도 참가하지 못했다.
44°29′58″N 34°9′19″E / 44.49944°N 34.15528°E / 44.49944; 34.15528Coordinates: 44°29′58″N 34°9′19″E / 44.49944°N 34.15528°E / 44.49944; 34.15528
그러나 얄타회담 이후 경제문제가 정치문제나 안보문제 보다 중시되기 시작하면서 연합국들의 독일정책은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독일의 산업생산시설을 무력화함으로써 독일의 경제력을 약화시키는 것이 독일 뿐 아니라 유럽 전체의 경제적 회복을 어렵게 할 것이라는 우려가 대두된 것이다. 당초 연합국들은 독일이 가진 경제적인 자원에 의하여 전쟁으로 피폐해진 유럽을 재건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의 석탄을 원했고 소련은 대대적인 전후 복구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독일경제에 어느 정도 역동성이 있어야 했고 독일경제의 역동성은 효율적인 행정시시템을 전제로 가능한 일이었다. 연합국들이 임의로 분단해버린 독일에서는 역동적인 국민경제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석탄과 철강은 대부분 영국군 점령지역에서 생산되었으나 영국군 점령지역에서는 석탄과 철광석을 채굴하는 광부들에게 공급해야 하는 식량이 부족했다. 미군이 점령한 독일 남부지역과 소련군이 점령한 중부지역에는 식량은 있었지만 에너지자원이 없었다. 이런 현실적인 이유에서 연합국들은 테헤란회담에서는 생각할 수 없었던 분단되지 아니한 통일국가 독일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패전국 독일에 통일적인 행정기구를 만드는 데에는 연합국들간 입장차이가 있었다. 프랑스는 독일의 민족주의가 부활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프랑스 정부수반 드골(Charles de Gaulle, 1890~1970)은 독일에 통일적인 행정조직을 만드는 것이 프랑스로서는 “죽느냐 사느냐(Leben oder Tod)”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한편, 소련은 미국이나 영국이 정치적으로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규모의 전쟁배상액을 독일로부터 빼앗아가고자 했다. 1946년부터 미국정부는 독일에 통일국가를 세우는 경우 그것이 소련에 의해 조종되어 친소련국가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인식하면서 통일국가 독일에 반대하는 프랑스의 입장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이런 배경에서 미국 외무장관 제임스 번즈(James Byrnes, 1882~1972)는 1946년 9월 “독일이 특정국의 위성국가가 되지 않는다는 점을 전제로 하여 독일내 각 점령지역을 가능한 통합한다”는 방침을 천명하였고 1946년 12월에는 미군과 영국군 점령지역이 경제적으로 통합되었다(이른바 “die Bizone"). 바로 이 시기에 그리스와 터어키의 내전과 폴란드의 선거부정을 계기로 냉전(Cold War)이 시작되었고, 1947년부터 독일은 연합국간 안보적인 대립의 중심지역으로 급부상했다. 그리하여 1947년 12월 런던에서 외무장관회담이 열렸을 때 영국 외무장관 어니스트 베빈(Ernest Bevin, 1881~1951)과 소련 외무장관 몰로토프(Vyacheslav Mikhailovich Molotov, 1890~1986)는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
몰토토프 : 우리는 독일이 통일국가가 되기를 바랍니다.
베빈 : 어떤 이유 때문입니까? 통일국가 독일이 공산주의국가가 될 것이라고 기대해서 그렇습니까? 독일인들이 공산주의자들이 될 수도 있겠지요. 독일인들은 진실된 말을 할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마음에도 없는 상투적인 소리를 단지 늘어놓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들 마음 속에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패배를 복수할 날을 손꼽아 고대하고 있는 지 모릅니다. 그것은 귀하가 본인 보다 더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몰로토프 : 물론 독일인들이 그럴 수 있다는 것 본인 또한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본인은 통일된 하나의 독일을 바라고 있습니다.
(1945년 포츠담의 3국 외교장관: 좌로부터 몰로토프, 번스, 앤터니 이든)
1952년 3월 10일 소련의 스탈린은 미국, 영국, 프랑스에 대해 자유로운 정당과 주민선거에 의한 독일 통일정부를 수립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리고 1955년 제네바에서는 미, 영, 프, 소 4개 연합국이 동서독으로 분단된 독일의 미래에 대한 결정권을 가지고 있으며 자유로운 선거에 의해 독일의 통일이 이루어져야 한다는데 4개국이 합의하였다. 이 때 소련의 후르시초프(Nikita Sergeyevich Khrushchev, 1894~1971)는 독일의 통일로 인하여 유럽의 안보체제에 중대한 변화가 있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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