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서독의 국기(國旗)와 동독의 국기 (by Thomas Baumann)

뇌하수체 2011. 1. 30. 11:52

 

지금으로부터 약 150년 전 독일사람들은 ‘우리는 하나다’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흑-적-금(Black-Red-Gold) 삼색의 깃발을 처음으로 흔들었습니다. 그 당시 오늘날 국가의 상징에 해당하는 것으로는 떡갈나무(die Eiche) 정도가 있었는데 게르만 신화에서 번개를 주관하는 신(Donnergott)이었던 토르(Thor)가 번개를 치기 위해서 잠시 떡갈나무에 머무른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국가상징이라 할 만한 것으로는 떡갈나무 말고도 독수리(Adler)가 있었고 전망좋은 성채(Bellevue)도 있었습니다. 국가(國歌, Hymne)나 브란덴부르크문(門)이 독일의 상징이 되기까지는 좀더 시간이 흘러야 했습니다.

Datei:Maerz1848 berlin.jpg
(1848년 3월 19일 베를린)

 

 

1813년 프로이센왕은 나폴레옹 군대에 대항하도록 뤼초우(Ludwig Adolf Wilhelm von Lützow, 1782~1834) 남작(Freiherr, Baron)에게 민병대를 규합하도록 합니다. 가난했던 민병대원들은 군복을 스스로 마련하여 입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가지고 있었던 검은색 천의 옷에다 붉은색의 옷깃을 붙였고 황금색의 단추를 달았습니다. 이것이 흑-적-금(Black-Red-Gold) 독일 삼색기의 효시(嚆矢)가 되었습니다. 흑적금 삼색이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를 거쳐 현재의 독일연방공화국(BRD)으로 계승되었다는 것은 다들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만, 구 동독(DDR)이 공산주의를 나타내는 적색의 국기 대신에 서독과 똑같은 흑적금 삼색의 국기를 채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 이유를 살펴보면 좀 놀랍습니다. 1948년 3월, 당시 동독공산당(SED) 당수였고 초대 동독총리(1949~1964)를 지냈던 오토 그로테볼(Otto Grotewohl, 1894~1964)은 흑적금 삼색만이 향후 독일 통일을 상징화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1848년의 3월혁명(Märzrevolution) 100주년을 기념하면서 나온 이 주장은 민족주의적 색채가 강했던 3월혁명의 뜻을 이어받는다는 취지였으므로 전혀 우연한 주장은 아니었습니다. 이 주장을 이어받아 바이마르공화국 대통령(1919~1925)을 역임한 프리드리히 에버트(Friedrich Ebert, 1871~1925)의 아들로서 동베를린 시장을 지낸 프리드리히 에버트 쥬니어(Friedrich Ebert, 1894~1979)가 흑적금 삼색을 동독 국기로 채택하자고 공식적으로 제안했습니다. 에버트는 흑적금 삼색이 신성로마제국에서 유래하는 색깔로서 안티프로이센을 나타낸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고, 특히 독일의 통일을 상징한다고 하였습니다. 사회주의적인 이념과는 무관하면서 다분히 독일의 민족주의적인 가치를 앞세웠던 에버트의 이 제안은 만장일치로 채택되었습니다. 당시 "서독(BRD)”에서는 동독이 국기를 정한지 1년여가 지난 후인 1949년 5월에야 연방의회에서 바이마르공화국 시대의 흑적금 삼색을 “연방공화국 국기(Bundesflagge)"로 사용하자고 결정하였습니다.

 

 

구 동독국기(1959~1990) [그림출처 : Jwnabd ]

 

1959년부터 동독은 흑적금 삼색기에 이삭과 망치와 콤파스를 그려넣었습니다. 이삭(Ähre)은 농부를, 망치(Hammer)는 노동자를, 콤파스(Zirkel)는 “창조적인 지식인(schöpferische Intelligenz)" 계층을 각각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구 동독의 인민군대가 ”서쪽의 분단고착주의 국가(westzonaler Separastaat)"와 동일한 국기를 흔들고 거기에 충성을 맹세하는 것이 싫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1960년대 후반까지 서독과 동독은 올림픽에서 똑같은 국기를 사용하면서 다른 200개 참가국들이 웃음을 자아내게 만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