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덴마크와 독일의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 (by Christopher Clark)

뇌하수체 2011. 7. 3. 21:02

1863년 겨울 「슐레스비히-홀슈타인(Schleswig-Holstein)」이 다시 국제정치 현안으로 등장했다. 1863년 11월 15일 사망한 덴마크왕 프레데릭 7세(Frederick VII)에게는 왕위를 승계할 남계혈족이 없었다. 그리하여 덴마크 왕위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등이 합의한 런던 의정서(Londoner Protokoll, 1852)에 따라 여계혈족인 크리스티안 10세(Christian IX, 1818~1906, “유럽의 장인, the father-in-law of Europe")가 승계하였다. 그러나 1863년 11월 19일 슐레스비히-홀슈타인공(公) 프리드리히 8세(Friedrich VIII. von Schleswig-Holstein, 1829~1880)가 슐레스비히 공국과 홀슈타인 공국의 지배권을 주장하고 나서면서 세 가지 상이한 입장이 대립하게 되었다.

 

 

우선, 덴마크는 「11월 헌법(Novemberverfassung, Novemberforfatningen)」을 통과시키면서 슐레스비히 공국의 합병을 선언했다. 이에 대해 독일 민족주의자들과 독일연방(Deutscher Bund, 1815~1866)은 슐레스비히-홀슈타인공(公) 프리드리히 8세의 지배권을 주장하면서 무력에 의해서라도 이를 관철한다는 입장이었다.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덴마크와 슐레스비히-홀슈타인공(公)의 주장에 모두 반대하면서 런던의정서(1850, 1852)에서 합의한 내용을 준수하어야 한다는 제3의 입장이었다. 독일연방은 지루한 협상 끝에 런던 의정서를 준수하여야 한다는 내용으로 최종 입장을 의결하였고 1863년 12월 23일 덴마크 국경으로 1만 2천명을 넘지는 않는 규모의 병력을 보내 별가른 저항을 받지 않고 아이더(Eider)강 이남 홀슈타인 지역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슐레스비히 지역은 사정이 달랐다.

덴마크는 슐레스비히 방어를 위해 최정예 전투병력을 배치해두고 있었다.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서로 긴밀히 협조하면서 슐레스비히에 군대를 보낼 수도 있다는 입장을 천명하고 있었지만 독일연방의 일원으로서가 아니라 런던 의정서에 서명한 국가의 입장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1864년 1월 베를린(Berlin)과 비인(Wien)은 다른 독일연방 가입국들과 사전협의 없이 덴마크에 대해 양국 공동의 최후통첩(Ultimatum)을 보냈다. 덴마크에 대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공조체제는 1850년대부터 1860년대 초반까지 지속된 양국의 라이벌관계가 조화와 협력의 정신으로 마치 변모된 듯이 보였으나 실은 동상이몽(同床異夢)이었으며 나중에 격렬하게 터져 나올 대혼돈의 도가니(Hexenkessel)를 서로 함께 달구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제2차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전쟁은 1864년 8월 1일 덴마크의 패배와 종전협상 합의로 끝났으나 뒤펠 전투(Düppeler Schanzen, Battle of Dybbøl)에 이은 알센(Alsen, Als) 섬 점령에 성공한 프로이센의 덴마크전 승리는 프로이센 국내 정치지형을 결정적으로 바꾸어 놓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