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역사상 여성(女性)이 정치적인 상징성을 가졌던 경우는 매우 드물다. 니벨룽겐 설화(Nibelungenlied)에 등장하는 여성 크림힐트(Kriemhild)가 있기는 하지만 지그프리트(Siegfried)나 군터(Gunther)와 같은 남성들에 가려 자기만의 고유한 정치적인 상징성을 획득하지는 못했다. 역사적으로는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1717~1780)가 여기에 해당할만한 인물이었지만 오스트리아 사람이라는 인식이 강해서 독일인들의 정서와는 거리가 멀었고, 더욱이 동시대의 프리드리히 대왕(Friedrich II., 1712~1786)의 후광에 의해 가려졌다. 가난한 사람들을 극진히 돌보아 성인(聖人, Heilige)으로 추존되었던 엘리자벳 폰 튀링겐(Elisabeth von Thüringen, 1207~1231)의 경우 중세시대 사람이어서 정치적인 상징이 되기에는 시기적으로 너무 멀리 있었다. 독일에는 18세기 이전까지 프랑스의 잔다르크(Jeanne d’Arc, 1412~1431)나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The Virgin Queen, 1533~1603)과 같은 여성이 없었다. 19세기에 비로소 프로이센 루이저 왕비(Luise von Mecklenburg, 1776~1810)가 시민적인 미덕과 여성적인 아름다움을 겸비한 왕비로서 투철한 정치적인 신념을 가지고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 1769~1821)에 대항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정치적인 상징성을 부여받았다.
프로이센의 루이저 왕비(Josef Maria Grassi 유화를 사진화)
그림출처 : http://www.oss.wroc.pl/wystawy/obrazki/portrety012.html
루이저 왕비는 살아 생전에 이미 당대의 많은 화가와 조작가들, 그리고 낭만주의 시인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거기에 더하여, 왕비가 34세의 젊은 나이로 간질환 및 심장질환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 독일인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리고 그녀가 요절(夭折)하게 된 것은 궁극적으로 프로이센을 침공한 적들 때문이라고 여겨졌다. 이렇게 루이저 왕비의 죽음이 프로이센을 위한 희생이라고 간주되던 시기에 막강하던 나폴레옹의 몰락의 시기 또한 가까워지고 있었다. 1814년 프로이센군이 나폴레옹군을 물리치고 파리(Paris)를 점령한 후 총사령관 블뤼허(Gebhard Leberecht von Blücher, 1742~1819) 장군과 참모장 그나이세나우(August Neidhardt von Gneisenau, 1760~1831) 장군이 몽마르트르(Montmartre)에 올라 파리시내를 굽어보던 때, 아우얼슈타트(Auerstadt) 전투(1806년)에 기병대 지휘관으로 참전하여 나폴레옹에게 궤멸적인 패배를 맛보았던 블뤼허 장군은 나직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해진다. “루이저 왕비님, 이제 당신의 복수를 했습니다(Luise, du bist gerächt.)". 루이저 왕비의 희생적인 죽음은 숭고하고 신성한 죽음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으며 루이저 왕비를 기리고 왕비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취지에서 19세기 및 20세기를 통틀어 프로이센 및 독일에서 가장 영예로운 무공훈장이었던 철십자훈장(Eiserne Kreuz)이 1813년 루이저 왕비의 임종일(3월 10일)에 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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