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더 많은 비스마르크를, 제대로 다루고 싶다”

뇌하수체 2011. 4. 6. 10:50

 

저자 인터뷰_ 『비스마르크 평전』출간한 강미현 박사

교수신문(http://www.kyosu.net, 2011.1.20)

 

E.H.카는 “역사는 우연을 가장한 필연의 연속”이라고 말했다. 강미현 박사(51세)에게는 비스마르크와의 만남이 그랬는지 모른다. 동아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괴팅겐대학으로 유학을 간 것부터가 우연의 시작이었다. 괴팅겐대학은 비스마르크가 법학을 공부한 곳이기도 하다. 괴팅겐대학에서 학부를 다시 밟고 석사과정에 진학했을 때 그의 지도교수는 마침 프로이센 연구의 대가인 루돌프 폰 타덴(Rudolf von Thadden) 교수였다. 1985년 타덴 교수가 건네준 소책자를 통해 비스마르크를 접한 후 그는 나머지 인생을 비스마르크에 바쳤다. 괴팅겐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해 성신여대 박사과정에 진학한 것도 비스마르크를 전공한 문기상 전 성신여대 교수(69세)가 있었던 탓이다.

 

『비스마르크 평전』(에코리브르)은 한 ‘사학자’가 20여 년에 걸쳐 파고든 집념의 결정판이다. 768쪽에 달하는 분량도 대단하지만, 이 책은 비스마르크의 생애와 정치역정뿐 아니라 19세기 독일 역사와 유럽사를 아우르고 있다. 비스마르크가 살았던 시대가 독일 역사는 물론 19세기의 유럽 역사와도 밀접하게 관련돼 있는 탓이다. 참고문헌만 10쪽에 달할 정도의 광범위한 사료 섭렵과 전문 연구자의 치밀함이 있었기에 가능한 작업이었다.

 

비스마르크만큼 역사적 평가가 양 극단을 오가는 인물도 많지 않다. ‘독일제국의 통일을 이룬 영웅’으로 칭송하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민주주의에 역행하고 전쟁과 피에 의존한 독재자’라고 폄하한다. 심지어 비스마르크의 최대 업적으로 평가받는 1871년의 독일 통일조차 ‘군부독재에 의한 쿠데타’라거나 ‘위로부터의 혁명’이 일구어낸 정치적 결과로 비하하기도 한다.

 

강 박사는 그러나 <교수신문>과의 통화에서 “시대마다, 정권에 따라 달라지는 일회적이면서도 양극단적인 평가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라며 “비스마르크의 공과와 그의 시대 또한 숲만 볼 것이 아니라 숲을 이루게 한 주변 나무들도 함께 들여다볼 수 있는 안목과 여유로써 바라봐야 한다”라고 강조한다.

 

평전을 쓰면서 그가 가장 중점을 둔 것 역시 이 부분이다. “비스마르크에 대해서는 극단적 평가만큼이나 단선적 평가가 많다. ‘철혈재상’이니 ‘외교의 대가’라고 평가하면서도 정작 왜 ‘철혈재상’이고 ‘외교의 대가’인지, 그 배경이나 이유는 생략해 버린다. 결과도 중요하지만 어떤 과정에서 왜 그렇게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었는지를 함께 보려고 했다. 그가 했던 정치에 대한 극단적인 평가 역시 정말 시간과 여유를 갖고, 공과를 함께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비스마르크의 전체상을 복원하기 위해 강 박사는 ‘다선의 정치’에 주목했다. 쉼 없이 안팎으로 서로 관련된 ‘다선의 정책’을 펼쳤던 인물인 만큼 일방적으로 흑백 중 하나의 색으로만 그의 전부를 그려내는 평가는 위험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는 비스마르크를 생각할 때면 ‘추’를 떠올리게 된다고 한다. “비스마르크는 항상 내정과 외정을 같이 본 인물이다. 내정을 위해 외정을 이용하기도 하고, 반대로 외정을 위해 내정을 이용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영국과의 관계나 자유주의자와 사회주의자를 타파하기 위한 해결책으로 식민정책을 펼치기도 했다”는 것이다. 비스마르크의 ‘다선의 정치’가 빛을 발한 것 중 하나가 프랑스와의 전쟁이다. 1866년 오스트리아와 형제전쟁까지 벌였지만 비스마르크는 프랑스나 러시아에 대비해 오스트리아를 영원한 적으로 만들지 않고 미래의 동지로 남겨뒀다. 실제 1870년 프랑스와의 전쟁 때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의 든든한 동맹국이 돼 비스마르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비스마르크는 이듬해 1월 독일제국을 선포하게 된다.

 

비스마르크의 이러한 전략은 한반도를 둘러싼 현재의 국제 정세에도 시사점이 크다. 강 박사는 “비스마르크는 항상 위기를 준비해 위기 상황을 만들지 않았을 뿐더러 프랑스를 고립시키기 위해 나머지 강대국들과 동맹관계를 적극적으로 구축해 갔다. 우리의 주된 동맹국은 미국이긴 하지만 중국, 러시아, 일본 등 어느 한 나라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비스마르크의 동맹정치가 크게 와 닿는다”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비스마르크 식 통일이 지금 우리에게도 모델이라는 말은 아니다. “비스마르크는 21세기와는 맞지 않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비스마르크는 제국주의와 권력주의가 팽배하던 19세기 유럽의 무대에서 철저하게 자기 국가를 위해 살다간 인물이다. 다만 본받고 싶은 게 있다면, 비스마르크를 다룬 문헌 어디에도 국가를 위해 권력을 탐했지 개인의 탐욕을 위해 권력을 탐했다는 구절은 한 군데도 없다는 점이다. 오늘날 우리 정치의 행태를 보면 정말 비스마르크가 말해 주는 것이 있는 것 같다.”

 

강 박사가 비스마르크 평전을 처음 준비한 건 10년 전이다. “외국에는 비스마르크 관련 서적이 7천권에 육박하고 전기만 해도 30권이 넘는다. 하지만 국내에는 관련 서적이 거의 없다. 두 세권 있긴 하지만 전문 역사학자의 글이 아니라 아쉬움을 많이 느꼈다. 비스마르크에 대해 이렇게 오랫동안 공부하면서 책 한 권 안 쓴다는 게 말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워낙 방대한 작업이라 작업 속도는 더뎠다. 3년 전에는 3분의 2 정도 진도가 나간 원고가 컴퓨터 하드디스크에서 몽땅 날아가 버리는 사고까지 터졌다. 예전에 썼던 문장이 기억나지 않아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쓰고 나서는 또 줄이는 작업이 힘들었다. 원고의 5분의 1 가량을 덜어냈다고 한다. 강 박사는 여전히 비스마르크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다. “더 많은 비스마르크를, 제대로 다루고 싶다”는 것이다. 강 박사는 “청소년 시절이나 정계 퇴임 이후는 세세하게 다뤘지만 다른 분야는 큰 틀에서만 건드리고 내용의 절반 밖에 다루지 못했다. 예를 들어 비스마르크는 세계 최초로 사회복지제도를 도입한 인물인데, 정말 간단하게만 언급했다”라며 “다음에는 정책들도 깊이 있게 다뤄보고 싶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다음 목표는 이번처럼 한 권짜리가 아니라 두 권 혹은 세 권짜리 전기를 다시 쓰는 것으로 잡았다. “외국에서는 워낙 대가들이 다룰 만큼 다 다뤘지만 한국에서는 내가 아니면 언제 또 나올지 모르잖아요. 한 5~6년 정도 걸릴 것 같아요.” 그 사이에 비스마르크의 일화집을 출판하고 싶은 생각도 있다. 공부하면서 틈틈이 30~40개 정도의 일화를 모았다. 하지만 독자들이 얼마나 관심을 가질지를 생각하니 마음이 밝지만은 않다.

 

“독일은 자연과학 못지않게 인문과학에 대한 투자가 대단하다. 우리는 세계화를 외치면서 세계사도, 국사도 가르치지 않는다. 너무 먹고 살고 돈 버는 쪽으로만 대학이 변해가는 것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은 상황이 돼 버렸다.” 수화기 너머 강 박사의 목소리는 어느새 잦아들고 있었다.

권형진 기자 jinny@kyosu.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