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Ein wunderbares Buch, 고명섭의 『하이데거 극장』

뇌하수체 2026. 6. 25. 23:37

 

교수신문(2022.12.1)에 실린  외대 철학과 이기상 교수의 서평입니다.

 

하이데거 발자취, 사상사적 ‘상상력’으로 재구성

서평_『하이데거 극장 1·2』 고명섭 지음 | 한길사 | 784·864

‘대학가의 숨은 왕’이라 지칭된 존재 철학자
현상학적 방법으로 사태를 근본적으로 주시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 하이데거의 별명은 ‘여우’였다고 한다. 자기 사상이 누구의 영향을 받았는지 알아차릴 수 없도록 기막히게 흔적을 싹 다 지워버리기 때문에 붙게 된 별명이라고 한다. 어쨌든 간에 그의 철학과 사상의 발자취를 철학사적으로 재구성해내는 것은 무척 어렵다. 그래서인지 그의 철학 전반에 대한 서술에서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 식의 단편적인 철학사 기술이 난무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숨죽이며 4주에 걸쳐 단숨에 읽어버린 『하이데거 극장 1·2』는 놀라운 신천지를 보여주었다. 저자 고명섭은 방대한 자료들을 일일이 검토하여 나름의 사상사적 ‘상상력’을 발휘해서 지금까지 많은 전공자들이 해내지 못했던 끊어진 고리들을 기막히게 잘 찾아 이어내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수긍할 만한 ‘하이데거 평전’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렇게 그는 한국 철학계에 획기적인 이정표를 세웠다.

20세기 가장 창의적인 사상가는 단연 하이데거이다. 그는 기존의 틀에 박힌 ‘강단 철학’을 뒤엎고 ‘새로운 철학하기’를 선보이며 학생들로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얻는다. 『존재와 시간』이 발간되기 전부터 그의 강의에 매료된 학생들은 하이데거를 ‘대학가의 숨은 왕’이라 지칭했다. 

하이데거는 통용되는 일반적인 해석을 따르기를 거부하고 ‘사태’를 근본적으로 다시 보려고 시도한다. 이것이 그 당시 새로운 붐을 조성하던 ‘현상학적 방법’으로서 ‘사태 자체에로!’이다. 후설이 주창한 현상학적 방법을 하이데거는 자기 것으로 만들어 독자적인 ‘현상학’을 구축해나간다. 

이런 방법론으로 무장한 하이데거는 기존의 철학적 해설 또는 해석에 반기를 들며 새로운 해석들을 시도한다. 예를 들어 플라톤의 철학이 지난 2천 년 동안 그리스도교로 인해 심하게 왜곡되었다고 생각하고, “플라톤에게로 돌아가자!”라고 외친 것이다. 플라톤뿐이 아니다. 모든 유명한 철학자도 마찬가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렇고, 칸트가 그렇다. 그래서 그의 많은 강의가 ‘현상학적 해석’이라는 이름이 붙은 강의로 선보였다. 플라톤에 대한 ‘현상학적 해석’,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현상학적 해석’, 칸트에 대한 ‘현상학적 해석’ 등등이 그렇다.

그의 이러한 현상학적 해석이 지금까지 강단 철학에서는 볼 수 없었던 독창적이고 창의적이며 아울러 근원적인 해석임을 듣는 사람들은 직감할 수 있었다. 그의 수많은 제자들이 하이데거로부터 바로 이러한 해석의 방법을 배워서 다들 자기 분야의 전문 사상가로 이름을 떨쳤다. 그중에는 예를 들어 1930년대 아리스토텔레스의 전문가로 통하는 발터 브뢰커가 있다. 그는 하이데거의 아리스토텔레스 강의를 듣고 거기서 배운 방법론으로 기존의 해석과는 다른 해석을 내놓으며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전문가 반열에 오른다. 이렇게 하이데거는 자기 강의를 통해 플라톤 전문가도 배출하고 칸트 전문가도 배출했다. 

하이데거 강의와 세미나를 빠지지 않고 참석하던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는 해석학의 권위자가 된다. 하이데거의 일상적 인간의 비본래적 존재방식인 ‘그들[세인, 사람들]’에 빠진 현상학적 분석에 착안해서 마르쿠제는 『일차원적 인간』을 쓴다. 사르트르가 『존재와 무』를 쓴 것은 하이데거 없이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도대체 프랑스 철학은 하이데거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다. 프랑스에서 유행하는 ‘트로아 아슈[3H]’의 세 철학자란 ‘헤겔, 후설, 하이데거’다. 

하이데거의 유명세에 걸림돌이 된 사건이 일어나는데, 1933년 44살의 나이로 프라이부르크 대학 총장이 된 일이 그것이다. 총장시절의 이 시기는 그의 인생에 어두운 그림자로 그를 항상 따라다녔다. 설명에 인색한 하이데거는 아무런 시원스런운 변명도 사과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사건은 그에게 철학의 판도를 바꾸게 만들었다. 그의 철학에 ‘전향’이 이루어진 것이다. 하이데거 후기에는 두 가지 주제가 핵심 사유거리가 된다. 한편으로는 ‘기술과 존재역운’이고 다른 편으로는 ‘존재와 언어’이다. 

최고로 어렵다는 하이데거 철학을 재미로 읽게 만든 고명섭 저자에게 45년 하이데거 철학에 몸 바친 서평자는 머리 숙여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누가 하이데거를 두려워하랴!

왜 “극장”인가에 대해 고개를 꺄우뚱하며 궁리해봤다. “학술적 글쓰기”와 차별화하기 위해서!? “극장”이라는 제목을 다니 표절과 베껴 쓰기 등의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온갖 자료들을 자기가 구상한 각본의 틀에 맞추어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다. 

저자 자신의 설명을 들어보자. 저자는 <무의 바다 위에서 펄쳐지는 드라마>(1, 71 이하)에서 하이데거가 니체 강의를 하면서 “극장”이라는 비유를 꺼내며 니체 사상을 소개했음을 상기시킨다. “세계라는 극장의 무대 장치는 한동안 옛날 그대로일지 모르지만 거기서 상연되는 연극은 이미 다른 것이다.”(『니체 II』 37쪽) 니체가 세운 극장에서 연출된 것은 “니힐리즘”이라는 이름의 연극이었다. 하이데거가 이렇듯 니체의 삶과 사유의 세계를 “극장”이라고 불렀다면, 똑같이 하이데거의 삶과 사유 세계도 “극장”이라고 부르지 못할 이유도 없다. 

이렇게 저자 고명섭은 2012년 『니체 극장. 영원회귀와 권력의지의 드라마』 (김영사, 864쪽)라는 방대한 책을 냈다. 그리고 그것이 대중의 관심에 부응해서 2020년 5쇄를 찍어냈다. 그렇게 두꺼운 책이 그렇게 많이 팔렸다는 것은 철학 출판계에서는 획기적인 일이다. 

여기에 힘입어 저자는 이제 하이데거 자신을 <하이데거 극장>에 올리면서 드라마의 제목을 “존재의 비밀과 진리의 심연”이라고 잡고 그 분량을 <니체 극장>의 두 배로 늘였다. 그야말로 야심찬 기획이고 철학계에서는 주목할 만한 사건이다. 칸트와 비슷하게 일생을 프라이부르크 부근에서 살며 오직 철학을 강의하고 지내며 드라마틱한 사건이라곤 나치에 연루된 것뿐인 사람의 이야기가 세인의 관심을 끌 것인지?! 정말 도박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저자가 펼쳐놓은 이야기보따리를 보니 승산이 있어 보인다. 

니체의 니힐리즘이 근대와 탈근대의 역사적 현장과 연결된 사건들이라면, 하이데거는 그의 철학의 스펙트럼을 서양 철학 전체에로 뻗친다. 서양 철학의 종말을 외치며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니체는 이성중심주의, 신중심주의를 강도 높게 비판하며 “신의 죽음”을 선포하고 육체와 감성의 복원을 강력하게 외치면서 포스트모던 사상과 예술의 길을 열었다. 

하이데거는 그보다 몇 걸음을 더 내딛어 감성과 영성이 되살아나고 그것들이 지성과 이성과 함께 어우러져 거울놀이를 하는 <세계 사방>의 새로운 사유를 내놓는다. 모든 것을 다 새롭게 사유하며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그야말로 “후천개벽의 대발상”이다. 존재와 무, 시간과 역사, 진리와 비진리, 아름다움과 빛남, 신성과 성스러움 등 진선미성(眞善美聖)을 전부 새롭게 사유하여 정립해야 한다는 획기적인 주장이다. 이러한 그의 사유 전개를 제대로 알아듣기 쉽게 풀어만 놓으면 누구나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좋은 소재이다. 저자는 그것을 보았고 그 방대한 스케일을 맛깔스러운 표현으로 짜임새 있게 연극대본으로 엮어서 독자들을 위해 풀어놓았다. 

저자는 하이데거라는 인물의 삶과 사상을 연극하는 <하이데거 극장>에서는 “무의 바다를 밝히는 존재와 진리의 드라마”가 펼쳐진다고 말한다. 
1권에서는 다음과 같은 연극이 펼쳐진다.
1부: 메스키르히의 마법사
2부: 신들과 거인들의 전쟁
3부: 형이상학의 검투사.
극장의 연극에 걸맞는 감칠나는 제목들을 달고 있다.
2권에서는 어떤 무대가 전개될까 궁금증이 돋는다.
제4부: 세계의 밤
제5부: 궁핍한 시대의 사상가
제6부: 숲속의 은자
에필로그: 무와 죽음.
매 막의 제목들이 한결같이 딱딱한 철학개념들이 아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마법의 말들이다. 

저자는 어려운 하이데거의 철학개념들을 아주 쉽게 풀이하여 편하게 이해하며 읽어나갈 수 있게 만들었다. 실타래처럼 얽히고설킨 하이데거 철학의 맥을 나름의 시각으로 짜임새 있게 짚어내어 그 전체를 일관성 있게 분류해서 멋있는 양탄자로 엮어냈다. 철학 전문인도 시도하기를 꺼려하는 사상사적 맥을 과감하게 짚어가며 영향사적 지적도를 만들었고, 철학의 핵심주제를 철학사적 전개에 따른 문제제기와 해결모색과 연관시켜 풀어보였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가 미래지향적인 안목으로 하이데거의 철학이 나아가야 할 길도 제시해보이고 있다.

도대체 이처럼 방대하면서도 재미있는 사상가의 평전을 읽은 적이 없다. <하이데거 평전>으로 전혀 손색이 없다. 국내에 번역된 거의 모든 하이데거 관련 책들을 다 참조한 듯 보인다. 물론 국내 철학전공 연구자들이 저술한 모든 전문서적들도 두루 다 읽어서 자기 것으로 소화시켜 재미난 각본에 투입시켰다. 그러니 <하이데거 극장>이라는 이름을 달았지만 하이데거의 사상과 철학에 관한 한 모든 지식과 정보가 다 집약된 참고서인 셈이다.

하이데거 전문가들도 한결같이 혀를 내두르며 이해하기 어려워 따라갈 수가 없다고 한 그의 전체 철학을 이렇게 한 두루미로 엮어낸 사실만으로도 이제 저자는 “최고의 하이데거 전문가”라는 칭호를 받을 만하다. 칸트처럼 한 곳에 머물러 일생을 지내다시피 했고, 농담이란 모르고 언제나 준비된 듯한 진지한 말만 하는 하이데거를 이렇게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인물로 만들어 출현시킨 저자의 상상력과 서술 능력에 그저 감탄할 뿐이다. 

이제 이 책은 하이데거 철학을 알고 싶어 하는 모든 독자들이 읽어야 하는 필독서가 될 것이다. 그뿐 아니라 20세기 최고의 철학자인 하이데거가 서양 철학 전체를 향해 제기한 그 모든 철학적 문제에 도전하여 새로운 지평을 열려는 이 땅의 모든 철학도들이 꼼꼼히 살펴봐야 할 기본 연구서가 될 것이다.
“이제 누가 하이데거를 두려워하랴!”    이기상 한국외대 철학과 명예교수

 

교수신문 2023.1.20에는 이기상 교수의 비평이 같은 책에 대한 비평이 실립니다.

 

일상어가 던지는 존재의 물음…일본어 중역은 오역

비평_‘하이데거’ 번역에 나타난 문제

 

필자는 『존재와 시간』을 번역해서 내고(까치, 1998), 이해를 돕기 위해 용어해설집까지 펴내고 『‘존재와 시간’ 용어해설』 (까치, 1998), 거기에 덧붙여 쉬운 해설서 『존재와 시간: 인간은 죽음을 향한 존재』 (살림, 2008)까지 출간했다. 그런 나로서는 이 부분에 많은 관심이 가지 않을 수가 없다. 하이데거 철학을 전공한 사람들은 다들 나름대로 『존재와 시간』을 번역해 출간하고 싶은 마음들이 있다. 

필자가 번역해서 내기 이전에 이미 네 종류의 번역서도 출간되었다. 내가 독일에서 하이데거 철학으로 학위 받은 1호이고 나 뒤로는 많은 사람이 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했다. 나를 비롯한 이 사람들이 모여서 한국하이데거학회도 구성하고 주기적으로 모여 어려운 하이데거 원전들을 같이 읽으며 토론을 했다. 그때 이들 연구자들이 한결같이 『존재와 시간』 번역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존재와 시간』에 등장하는 하이데거 특유의 개념들을 갖고 많은 토론을 벌였다. 어쨌거나 나는 나 나름대로 일찍 귀국했기에 학부와 대학원에서 『하이데거 철학』을 강의와 강독을 하고 세미나도 하면서 다양한 강의록들을 만들어 수강생들의 이해를 도우려 애를 많이 썼다. 『하이데거의 실존과 언어』 (문예출판사, 1991)를 시작으로 『하이데거의 존재와 현상』 (문예출판사, 1992), 『하이데거 철학에의 안내』 (서광사, 1993) 등을 잇달아 출간했다. 명실공이 하이데거 철학 전도사 역할을 했다.

필자가 계속 주장해온 것이지만 하이데거는 처음으로 일상의 독일어를 철학개념으로 삼아 살아 있는 인간 현존재의 철학을 펼친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말로 『존재와 시간』을 옮기려면 이러한 하이데거의 철학적 의도를 감안해야 한다. 하이데거의 일상언어 분석은 사전적 의미가 아니다. 그래서 독한(獨韓)사전을 가지고는 알 수가 없는 개념들이다. 필자는 10년을 독일에 살면서 일상어의 심층문법을 익혔기 때문에 어느 누구보다도 생활 세계적 의미를 잘 파악한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필자는 이미 번역돼 있는 4종의 『존재와 시간』 번역서를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대부분이 일본어를 통해 중역을 한 것들이었다. 나는 아예 일본어를 모른다. 그래서 더욱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오히려 『존재와 시간』 번역에 도움이 되었다고 자신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때까지는 『존재와 시간』의 핵심개념인 Vorhandensein, Vorhandenheit를 “안전존재”, “안전성”이라고 번역했다. [나는 “눈앞의 존재”, “눈앞에 있음”이라 옮겼다.] Zunandenes, Zuhandenheit를 “용재자”, “용재성”이라고 번역했다. [이것은 “손안의 것”, “손안에 있음”이라 옮겼다.] 이 단어들은 한자표기 없이는 무슨 말인지 감조차 잡을 수 없는 낱말들이다. 하이데거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일상 독일어로 철학개념을 삼은 것인데, 그것을 일본어 번역어를 그냥 베껴 쓰니까 뜻조차 알 수 없는 이상한 외계인 개념이 돼버린 것이다. 이런 개념들이 수도 없이 많다는 것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어떤 교수는 zu-sein을 “지향 존재”라고 번역하고 있어서 그야말로 깜짝 놀랐다. 거기서의 “zu”는 동사의 부정형을 표기하는 독일어인데 그것을 방향을 나타내는 전치사로 본 것이다. 그야말로 어이없기 그지없는 오역이다. 어찌나 고집 세게 우겨대는지 이야기를 할 수조차 없을 지경이었다. 어느 일본교수가 그렇게 해석했다고 나중에 자백했다. 하이데거가 인간의 존재는 “존재해야 하는 바로 그 존재함”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zu-sein”이라 쓴 것인데 그것을 전치사로 보다니!!


독일어만 읽어서는 하이데거가 무슨 의미로 그런 말을 사용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일본어 번역을 보며 그대로 따라하니 그런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벌어지는 것이다. 내가 귀국했을 때의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번역 상황은 이 지경이었다. 그런데 일본어에 길들은 나이 많은 교수들은 자신들이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그 말도 되지 않는 번역을 그저 우겨댔다. 이야기와 토론이 되지를 않았다. 특정대학의 교수는 자기 제자들로 하여금 자기의 번역어만을 사용할 것을 암암리 강요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존재와 시간』의 주요개념의 번역어가 통일이 되지 않고 우왕좌왕하게 되었다. 그러나 많은 하이데거 철학을 배우는 학생들이 내 번역서와 해설서들을 읽으면서 내 번역용어에 힘을 실어주는 덕분에 내 번역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런 경험을 겪은 나이기에 『존재와 시간』의 용어들에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하이데거 극장』의 저자 고명섭은 나름 객관적인 입장에서 자신이 선호하는 번역어들을 택해서 1권 2부를 전개시켜 나가고 있어 그런 그의 관점을 나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용어의 통일이 안 되고 있는 상황에서 좋은 중개인 역할을 떠맡은 것 같아 고맙기까지 하다. 

필자는 지금까지 하이데거 철학과 관련된 논문을 42편 발표했다. 수없이 많은 학술대회에 발표자와 토론자로 참석했고 수많은 대담을 했고 수많은 칼럼들과 서평들을 썼다. 그리고 『존재와 시간』을 비롯해 내가 하이데거 철학 원전을 번역해서 출간하고 하이데거 철학을 연구하고 소개하기 위해 발간한 책도 22권이다. 내 연구 인생을 오롯이 하이데거 철학 연구와 전파를 위해 보낸 셈이다. 거기에 나름의 자부심을 갖고 있다.

고명섭 저자는 “시간”의 지평 속에서 “존재” 물음을 제기하며 해결의 길을 찾아나가는 『존재와 시간』의 실존론적 분석을 잘 따라가면서 중요한 실존 계기들과 실존 범주들을 쉽게 풀이하며 해설해내고 있다. 그리고 『존재』와 『시간』의 문제가 『존재와 시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하이데거가 일생 여러 다른 시각에서 새롭게 도전하며 풀어나가는 핵심문제인 것을 감안해서 그런 존재 사유의 길을 계속 추적하며 연결지어 설명해내고 있다. 서양 형이상학의 역사를 존재망각과 무(無)제거의 역사로 보는 후기 사유의 실마리를 찾아내서 뒤좇는다. 

이러한 존재물음은 허무주의의 도래와 그 극복을 위한 시도와 연결되며 니체 철학의 분석을 걸쳐 시인 횔덜린을 통한 구원일 길 찾기로 이어진다. 그것은 하이데거 자신의 국가사회주의(나치)의 개입과 그 실망의 시련을 극복해보려는 노력의 일환으로도 보인다. 그것은 테크네(기술) 주도로 펼쳐지는 존재사건의 역운적 전개와 무관치 않다고 보는 시각 속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 『기술과 전향』의 시도가 개진된다.

하이데거는 그의 삶 후반부에 시인 횔덜린과의 사유의 대화를 통해 망각해서 잃어버린 신적인 차원을 되찾아오려는 노력을 기울인다. “오직 신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호소 속에 새로운 『세계 사방』이라는 사유의 길을 찾아 나선다. 서양 형이상학의 종말을 초래한 것이 제일 원인이며 창조주이고 절대정신인 이성중심의 “계산하는 사유”에 있었음을 통찰하고, “존재”와 “시간”을 내주는 존재 역운적 “존재생기의 사건”에 주목한다. 그러면서 그런 존재사건 속에서 눈짓으로 알려오는 존재의 뜻을 알아보는 “뜻새김의 사유”가 요구된다고 주장한다. 하늘과 땅, 죽을 자와 신적인 것들이 펼치는 “사방 세계”의 거울놀이 속의 “세계하다”와 “사물하다”를 읽어낼 수 있을 때 죽을 자로서 “인간하다”의 몫이 무엇일지를 깨닫게 된다. 이런 새로운 사유의 지평 속에서 “존재”와 “진리”의 의미를 새롭게 밝혀내야 한다. 

이렇게 “존재의 비밀”을 파헤치며 “진리의 심연”을 넘나드는 『하이데거 극장』의 이야기는 이어져 나간다. 자칫 지루하고 무미건조하기 쉬운 철학의 주제들이 주변에 등장하는 후설, 야스퍼스, 한나 아렌트 등으로 인해 재미있는 에피소드와 함께 시대적인 상황을 함께 추체험하는 좋은 기회를 맞게 된다. 다 기막힌 저자 고명섭의 연출 덕분이다. 재미 속에 중요 철학개념들을 익히면서 돗단배를 타고 20세기 초 격동의 시대를 만나게 된다.

출처 : 교수신문(https://www.kyosu.net)

 

저자가, 마르틴과 한나 II 라는 제목을 붙이고, 마르틴 하이데거와 한나 아렌트가 2차세계대전 종전 후 독일의 하이데거 고향 마을 부근 호텔에서 다시 재회하는 부분을  읽으면, 너무도 생생한, 극장에서 보는 영화의 한 장면 같아서 , 찔끔 눈물이 나기까지 합니다.

(기사 인용 이데일리 2023.9.26 by 김미경 기자)  제38회 만해문학상 특별상은 고명섭 한겨레신문 기자의 인문서 ‘하이데거 극장: 존재의 비밀과 진리의 심연’에 돌아갔다. 만해문학상은 시인이자 독립운동가, 불교 승려였던 만해 한용운(1879년~1944년) 선생의 업적을 기념하고 문학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1973년 창비가 제정했다.